이바지 장학회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열에 두 서넛만 대학에 다니던 70년대에는 장학금도 참 귀했다. 대부분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해준 돈에 아르바이트로 번 것을 합해야 근근이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누가 좀 도와주면 책도 좀 사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 텐데…. 늦은 밤 과외 마치고 돌아오며 한숨 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의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면 이처럼 절실한 젊은이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 결심을 하게 된.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대부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지를 받들던 흥사단아카데미 출신이지만 관계없는 사람도 합류했다. 막 직장을 잡고 나서의 일이다. 대학원 마치고 입대를 한 사람이 제대를 코앞에 두고 합류하기도 한다. 하필 새해를 시작하는 날 장학생 탈락 소식을 접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이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터무니없는’ 포부로 시작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그 예산 모으려면 몇 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금방 깨닫게 된다. 그래서 모금의 가시적 성과도 확인할 수 있는 장학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85년 처음 선발한 장학생은 겨우 한 명, 군대를 마친 남학생을 뽑아 졸업할 때까지 4번의 장학금을 주었다. 그가 졸업하면 다른 한 명을 선발하고…. 이제는 매년 3명씩 뽑아 6명에게 매학기 100만원을 지원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월급쟁이들의 십시일반이라 기금은 초라할 수밖에 없다. 매년 모금하는 것으로 장학금과 운영비를 충당한다. 회비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 형편에 따라 스스로 액수를 정한다.

 

특이한 것은 장학생 출신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단순이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런 마음을 키워나가는 것이라고 자부하기도 한다. 이런 뜻은 가족들과 함께 모임을 꾸려나가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식들에게도 이런 뜻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현재는 장학생 출신이 회장을 비롯한 임원을 도맡아 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가장 큰 보람은 환갑 근방의 노인(?)들이 자식들보다 훨씬 어린 대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술잔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작은 헌금으로 스스로의 젊음도 챙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행운의 소득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무릅쓰지는 않고 부러워하고만 있다는 것. 부자가 아니니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가당치 않지만 이를 통해 귀족이 될 수는 있을 터인데. 이종민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