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여고생의 각오

▲ 정성려
2014년 봄은 내 인생의 봄날이다. 오십 중반을 넘어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얀 칼라에 까만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가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뒷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난 멍하니 바라보곤 했었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때로는 먼 길로 돌아서 다니기도 했다. 어쩌다 학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뒤로 물러설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배움에 대한 미련은 또 하나의 자식이 되어 커가기만 했다. 그런 나머지 이것저것 관심을 갖다보니, 학력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의 자격증은 여러 개 얻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다보니 등단을 하고 수필집 〈엄마는 거짓말쟁이〉를 내놓기도 했다.

 

그동안 고등학교를 나와야할 텐데 생각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 넷을 키우며 내 자신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남들의 시선이 부끄러웠다. 일삼아 고등교육도 못 받은 사람으로 밝혀지는 것이 창피해서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 이렇게 고비마다 망설이고 미루던 중, 중학교 동창이 뒤늦게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사실을 알았고, 더욱이 70세 어르신이 손녀 또래들과 나란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연을 어느 수필가의 감동적인 글에서 읽고, 나는 그동안 자제해왔던 충동감이 되살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큰 맘 먹고 입학을 하고보니 지난날의 망설임이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입학전형서류를 가지고 전주여자고등학교를 찾던 날,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슴은 쿵쾅쿵쾅 얼마나 뛰었던가!

 

입학하던 날, 입학생을 대표해서 입학선서를 읽게 되는 영광도 안았다. 평소 바쁜 남편과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틈 없는 큰딸까지 꽃바구니를 안겨주며 축하해주었다. 초등학교 입학식보다 하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남편과 딸만 눈에 들어왔다. 입학식 날, 그때 내 기분은 40년 전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교실로 돌아온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기성세대로 보였다. 그들도 나처럼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것에 대한 아픔 때문에 용기를 내어 왔을 것이다. 입학식 전날 밤, 교실에서 재잘대는 여고생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이 없었고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얼굴에서 당찬 용기와 각오를 보았다.

 

어디선가 할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남자의 머리 위로 올라가고 결국 집안을 망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새삼스럽게 떠올라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나의 배움을 막았던 할아버지와 울며불며 대응했지만 설득을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결코 할아버지의 완고함을 아버지도 설득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다. 난 지금, 저승에 계신 아버지께 죄송스러울 뿐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꿈을 실현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공부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서 시소타기를 해왔던 나약함은 이미 버렸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분발해서 대학진학도 해야겠다. 이미 〈엄마는 거짓말쟁이〉라는 수필집을 내놓기는 했지만 문학 세계에서 더 품격 높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싶다. 인생은 짧다고 하지만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에는 지금도 늦지 않다. 어쩌면 가장 빠른 나이인지도 모른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이 새내기 여고생은 당차게 공부를 할 것이다.

 

△수필가 정성려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엄마는 거짓말쟁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