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와 세월호

부안군 위도면 진리 언덕에는 서해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위령탑이 있다. 20년 전,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서해훼리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이다.

 

362명을 태운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것은 1993년 10월 10일이었다. 승객 대부분은 섬지역 주민들이거나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나선 관광객들. 기상특보 기준을 넘어서진 않았으나 ‘파고가 높고 돌풍이 예상되므로 선박운행에 주의하기 바란다’는 기상청의 예고가 있던 날씨였다. 항해를 하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여객선은 출항을 강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파고는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 여객선은 서둘러 위도로 돌아오려고 선수를 돌렸지만 순간, 선체가 기울면서 배는 순식간에 침몰했다. 이 사고로 292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내외 언론들은 이 어이없는 사고를 ‘일어나서는 안 될 후진국형 인재’로 규정했다.

 

사실 서해훼리호 침몰 원인은 날씨와 무리한 운항만은 아니었다. 정원을 초과해가며 가득 실은 승선객, 관련법규를 어긴 승선원 수, 항해사 휴가로 간판장이 항해사를 대신해 운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에 재난구조 시스템까지 긴밀하게 작동되지 못하면서 희생자는 더 늘어났다. 20년이 지났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고 악몽이다.

 

되돌아보면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이 있었던 1990년대는 유난히 대형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1993년 목포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과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9년 씨랜드 화재 등 대형 참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사고의 현장에서 극적으로 간신히 살아난 적잖은 사람들 역시 후유증과 삶의 변화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다시 그 악몽을 되살아나게 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16일 오전 475명이 탄 제주도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참사다. 여객선에는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선 고등학생 수백 명도 승선해 있다. 그러나 17일 오전 현재까지도 구조작업은 더디고 290여명의 실종자 중 확인되는 사망자 이름만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이어지는 보도를 보면 ‘세월호’ 참사에서도 야간 출항 강행, 승객들 보다 먼저 배에서 탈출한 승선원, 잘못된 구조정보 등 ‘서해훼리호’ 참사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안전불감증의 숱한 경고를 무시한 댓가가 너무 크다. 희생자들에게 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