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남원 교룡산성에 남은 역사의 흔적] 최제우, 남원 은적암서 머물며 동학사상 이론화

'인내천 사상' 널리 펴려 했지만 영남 사대부 비난에 전라도 피신 / 선국사 은적암서 수개월 지내며 동학관련 글 집필·칼노래도 지어

   
▲ 남원 교룡산성 홍예문.

‘겨우 한 가닥 길을 찾아 걷고 걸어서 험한 물을 건넜다. 산 밖에 다시 산이 나타나고 물밖에 또 물을 건넜다. 다행히 물 밖의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밖의 산을 넘어서 바야흐로 넓은 들에 이르자 비로소 큰 길이 있음을 깨달았네.’

 

조선 후기에 동학을 창시한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쓴 시 한 편이다. 이 시(詩)는 인간의 삶을 짧고 간결하게 노래한 시라고 볼 수 있다.

 

최제우가 살았던 그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가 펴고자 했던 사상은 국가적으로 보면 이단이었다. 그 시대에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한울님이 있다고 설파한 그의 사상은 얼마나 불온한 것이었던가. 수운 최제우의 자취가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이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이다.

 

△교룡산성 안의 선국사 은적암

 

교룡산의 중턱을 띠처럼 휘감고 잘 다듬어진 작은 돌로 담장처럼 쌓여진 교룡산성은 〈남원지(南原誌)〉에 의하면 백제 때에 축성된 것이라 한다. 성의 둘레는 3200미터에 달하며 높이는 4.5미터쯤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4대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서·남·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문인 홍예문(虹霓門)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 선국사 전경.

교룡산성 안에 있어 산성절이라고도 부르는 선국사의 본래 이름은 용천사(龍泉寺)이다. 용천사가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분명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선국사가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승려들만 300여 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칠성각·요사채, 그리고 지리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보제루(普濟樓)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선국사의 작은 암자인 은적암에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8개 월 여를 머물렀던 사람이 최제우였다. 최제우는 1824년 경주 현곡리에서 근암(近庵) 최옥과 청주 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도언(道彦)이며 호는 수운(水雲) 또는 수운재(水雲齋)라 했다.

 

최제우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인물이 훤칠해서 주변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보따리 장사를 택했다. 그 이유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였다. 최제우는 그의 나이 스물하나가 되던 1844년에서 1854년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 대웅전과 석탑.

당시 돌아다니던 곳 중에 삼각산과 금강산, 그리고 남원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닌 것으로 보인다. 최제우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 난국을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공맹의 도를 말하거나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천주교까지 섭렵했지만 그것들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큰 고민에 빠진 최제우는 1854년 봄 스스로 해답을 찾기로 결심한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참다운 진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최제우는 나라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처자를 데리고 울산으로 갔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일은 어긋나기만 했고 뜻한 바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던 용담정에 돌아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유유자적하기로 결심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그러던 중 1860년 4월 5일. 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 집에 돌아왔는데, 그 날 최제우는 상제의 음성을 들었다. 훗날 최제우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한 경지 속에서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나의 신성한 부적을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

최제우는 한울님의 말씀을 듣고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고 신비한 빛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 체험을 계기로 최제우는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최제우는 그 뒤 수심정기(守心正氣), 즉 한울님의 마음을 잃지 않고 도의 기운을 기르는 데 열중한 그는 〈용담가龍潭歌〉, 〈처사가(處士歌)〉, 〈교훈가(敎訓歌)〉, 〈안심가(安心歌)〉 등의 가사를 연이어 지은 뒤 다음해에는 13자 주문을 지었다.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인내천 사상과 인간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리를 폈다.

 

‘부하고 귀한 사람이 지나간 때에는 빈천으로 되고 빈하고 천한 사람이 다가올 때에는 부귀가 된다.’

 

△관의 감시를 피해 은적암으로 은둔하다

 

도를 깨우친 최제우는 동학을 널리 펴려 했지만 이내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추로지향(芻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을 자처하는 영남의 사대부들이 동학을 비난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빗발쳤다. 결국 경주 관아에서 최제우를 불러다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최제우는 울분에 찬 마음을 안고 그 해 12월 전라도로 피신하게 된다. 울산과 고성을 거쳐 여수를 지나고 구례를 거쳐 경주를 떠난 지 2개월만인 12월 15일경 남원에 이르렀다.

 

남원에 도착한 최제우가 처음 만난 사람은 광한루 밑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서형칠(徐亨七)이었다. 그를 찾아간 것은 경주를 떠날 때 약종상을 하던 최자원(崔子元)으로부터 받아온 귀한 약재를 팔기 위해서였다.

 

이때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局三), 서공서,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이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했다. 이것이 남접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 서형칠이 최제우를 교룡산성의 조용한 암자인 덕밀암으로 모셨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법경을 외워 소원을 축원하며 새벽 불공을 드렸다. 송구영신의 회포와 감회를 금치 못하면서 외로운 등불 아래서 한밤을 지샜다.’

 

선국사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은적암 터 가는 길, 덕밀암터 가는 길’’이라는 나무 팻말이 표시되어 있고, 능선 아래 대나무숲에 쌓여 있는 은적암터에 이른다. 최제우는 이곳 덕밀암에서 6개월을 지내며 암자의 이름을 은적암(隱蹟庵)이라 고쳐 불렀다.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 스산한 타향의 서러움, 그리운 친지들과 처자들을 생각하며 보낸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겠는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는 이 기간 동안 “힘써서 〈도수사(道修詞)〉를 짓고 〈동학론(東學論)〉과 〈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61년 2월 경, 최제우는 이곳 은적암에서 〈칼노래〉 즉 ‘검가’를 지었다. 칼 노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중에 혁명적인 노래의 핵심이 되었는데, 최제우는 묘고봉(妙高峰)에 올이 노래를 부르면서 칼춤을 추었다고 한다.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패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 만년의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대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 있네, 만고망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최제우는 선국사 근처의 대밭 속에서 또는 그 뒤를 이어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論學文)〉 등을 집필하였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최제우가 은적암에서 지은 〈논학문〉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최제우는 자신이 창시한 도의 이름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서학에 비견하여 동학이라 지은 뒤 동학이라 지은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는 동방에서 나서 동방에서 산다. 도는 천도라 하여도 학은 동학이다. 땅이 동서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서를 동이라 하고 동을 서라 부를 수 있겠는가?(중략) 우리 도는 이곳에서 받아 이곳에서 넓힌 것이기 때문에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제우는 그 뒤 6월 경주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 은적암에서 〈수덕문(修德文)〉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지었다. 그 뒤 최제우는 남원 생활을 접고 6월 하순에 길을 떠나 7월 초순 경주에 도착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최제우는 동학의 단위 조직인 접을 만들면서 동학을 전파하다가 1863년 12월 10일 새벽, 구미산 자락 용담골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가던 최제우는 여러 가지 복잡한 국내외 상황 때문에 대구로 되돌아왔고,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때 남원에서 지은 〈칼노래〉가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동학의 두목 최제우는 삿된 방술로써 사람을 고치고 병을 낫게 한다고 사칭했으며 주문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속였고 칼 노래로써 국가의 정사를 모반했으니 좌도난정률(左道亂政律)에 따라 처형함이 마땅하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최제우의 목을 아무리 칼로 내리쳐도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경상감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 최제우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맑은 물 한 그릇을 가져오라.”

 

그렇게 최제우가 청수(淸水)를 마신 다음에야 순조롭게 형이 집행됐다. 이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지금까지도 청수가 교주의 맑은 피를 뜻하고 있다. 그 때 최제우의 나이 41세였으니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전파한 지 햇수로 불과 4년만이었다.

 

최제우가 은적암에서 숨어 지낸 8 개월이 남접(南接)의 시작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김개남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 선국사였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수운이 은적암서 만난 송월당 스님 "이미 물든 종이는 건지려면 찢어질 뿐이니…"

   
▲ 은적암 터.

수운이 이곳에 머물러 있자 남원지역에 사는 많은 유생들과 스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와 문답을 나누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송월당(松月堂)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스님이었다.

 

수운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서, 수운과 담론을 즐기기 위해서 찾아 온 노스님은 수운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은 불도(佛道)를 연구하십니까?”

 

수운이 답하기를 “예, 나는 불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중이 되지 않으셨소?”

 

“중이 아니고서도 불도를 깨닫는 것이 좋지 않소?”

 

“그러면 유도(儒道)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유도를 좋아는 하지만 유생(儒生)은 아닙니다.”

 

“그러면 선도(仙圖)를 좋아합니까?”

 

“선도를 하지는 않지만 좋아는 하지요.”

 

“그러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 하니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운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두 팔 중에 어느 팔을 배척하고 어느 팔을 사랑하는지요?”

 

노승은 그때서야 그 말의 뜻을 깨닫고서, “예 알겠습니다. 선생은 몸 사랑하는 분이시군요!” 하였고 수운은 그의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오직 우주의 원리인 한울님의 도(道), 바로 그 천도(天道)를 좋아할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노스님은 감복하여 한참 동안 말을 잊고 있었다.

 

훗날 제자들이 수운에게 물었다. “은적암 노승에게 왜 도를 전하지 않으셨습니까?”수운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미 물든 종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하나니, 노승은 이미 물든 종이라. 건지려면 찢어질 뿐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도리어 옳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