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충제의 중심 인물인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은 1878년 임실군 성수면 삼봉촌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고종폐위와 군대해산 등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가만히 앉아 바라볼 수만 없었다.
3대 독자로서 17세 이른 나이에 결혼했던 이석용 대장은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이 태인에서 임병찬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
이석용 의병장은 29세 때인 1907년 진안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 이름을 내걸고 거의한 뒤 임실과 진안, 태인, 장성 등 전남·북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1908년 10월부터 일제가 1만여명의 병력으로 호남의병토벌대를 편성, 3차에 걸쳐 포위공격을 하는 바람에 이석용 의병대도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결국 1909년 3월 의병들을 해산하고 후일을 기약했다.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완전 상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의병을 모아 저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석용 의병장은 1912년 비밀결사대 ‘임자년 동밀맹단’을 조직, 활동을 준비하던 중 의병활동 시절 도움을 받았던 정동석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석용 의병장은 전주법원 재판 최후 진술에서 “한가지 한이 되는 것은 이등박문이 안중근 손에 죽었는데, 우리나라 5적·7적을 죽이려다 못죽인 것이요, 또 동경과 대판에 불을 지르려 했는데 못이룬 것이다”고 말했다.
이석용 의병장은 1914년 4월1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석용 의병장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양영두)는 4월30일 학술대회 등 행사를 열고 100년 전 조국 수호에 목숨 바쳐 싸운 선열의 뜻을 되새겼다.
뒤돌아 보면 몽고전쟁, 임진왜란, 일제침략, 6.25전쟁 등 큰 전쟁 때마다 의병들은 국가 존립의 커다란 방패였다. 그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계승해 나갈 때 국가 미래가 보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