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늦복'

우울한 시절, 귀한 책 한권을 선물 받았다. 올해 86세, 박덕성 할머니와 며느리 이은영씨가 주고받은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순창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임실 진메마을로 시집온 할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4남 2녀를 낳아 길렀다. ‘부지런하기로 말하자면 이 세상 따라갈 사람 그 어디에도 없을 만큼’ 일만하고 살았던 할머니는 몸이 아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집을 떠나 전주로 왔다. 아들집과 병원을 오가는 일상은 당연히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병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할머니의 신세한탄과 푸념이 늘어 갔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 바느질을 좋아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느날 천과 실이 담긴 반짇고리를 사들고 가 조각보를 만들어보시라고 권했다. ‘여기서 이것을 어떻게 한다냐’며 실만 뒤적였던 할머니는 며칠 지나 며느리 앞에 다섯 개의 조각보를 내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의 바느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작은 들꽃과 예쁜 문양이 새겨진 생활용품들을 쏟아냈다. 며느리는 한글 낱자 정도 더듬더듬 읽을 줄 아는 할머니에게 다시 글쓰기를 권했다. 바느질만 하겠다며 밀어냈던 할머니는 며느리의 강권에 글쓰기도 시작했다. 하루에 하나씩 짧은 문장을 만들어 쓰시게 하기 위해 며느리는 할머니의 지난 삶을 이야기로 들어가며 기록하고 녹음을 했다.

 

책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 할머니와 그 세상을 만나게 해준 며느리가 이루어낸 결실이다. ‘바느질, 글쓰기를 하니까 맘이 좋다. 한 가지 하면 또 한 가지 생각나고 해놓고 봉게 더 좋다. 어치게 니가 그렇게 생각을 잘해서 나를 풀어지게 해놨냐’는 할머니 말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할머니가 지난 삶을 돌아보며 며느리를 향해 보내는 화해이자 지극한 사랑과 고마움의 표현일터다.

 

여든을 넘어셔야 만난 이 눈부신 세상은 할머니에게 ‘늦복’이다. 이시형 박사는 이러한 할머니의 새로운 일상이 ‘보통의 노인이 보낼 수 있는 가장 풍성한 노년의 모습’이라고 전한다.

 

책의 저자인 할머니의 아들은 김용택 시인이고 이은영은 시인의 아내다. 나는 이들 고부간의 이야기를 1년 전 쯤에 들었다. 그 과정이 흥미로워서 결실이 어찌될지 궁금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신 지인들이 적지 않다. 부모님께 ‘늦복’안겨드리는 일을 아직은 먼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그들에게 할머니의 늦복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