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만 켜도 너나없이 책읽기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가뜩이나 입시에 찌든 학생들은 추천 도서 목록을 뒤져가며 책 읽는 시늉을 하느라 바쁘다. “책 읽자”는 외침은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출판업계 교보문고·민음사도 지난해 영업 적자를 면치 못했다.
글쓰기 능력 역시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대학 진학 전에는 논술로,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과제와 시험 답안 작성이 글쓰기가 되고, 회사에 입사해도 아이디어와 업무를 글로 제출하며 설득력 있게 토론하는 능력까지 요구받는다.
이처럼 독서·글쓰기·토론교육이 초·중·고교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원경 경북사대부중 교장, 황춘임 전주독서동아리연합회장, 윤일호 진안 장승초 교사, 천호성 전주교대 교수는 “전북지역 책읽기·글쓰기·토론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없다”면서 “대개 일회성·전시성 행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본보는 분야별 전문가들로부터 전북지역 독서·글쓰기·토론교육의 현주소를 짚고 문제점 해결 및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기획시리즈 ‘응답하라, 책읽기’를 마무리한다.
△한원경 경북사대부중 교장
한원경 경북사대부중 교장(55)은 학계에서 교육 혁명으로 평가받는 대구의 책읽기·책쓰기·토론을 통합시킨 혁신적인 모델을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대구교육청 교육과정운영과 담당자로 근무하면서 2004년부터 책읽기·책쓰기·토론교육에 팔소매를 걷어부쳤다.
하지만 한 교장도 “학교 현장에서 독서를 독려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했다. “행사나 추천도서 목록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아침 독서 10분 운동’처럼 학교에서 최소 10분이라도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구교육청이 2009년부터 전개한 책 쓰기 프로젝트인 ‘학생 저자 10만 양성’을 꼽으면서 ‘중딩에 의한, 중딩을 위한 국어교과서’를 예로 들었다.
“이 책은 중학생들이 쓴 교과서입니다. 어른들이 가르치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 중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내용으로 쓴 책입니다. 중학생들이 직접 시나 소설도 써서 사춘기 학생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구교육청은 디베이트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토론전문가 캐빈 리가 초·중·고 학생들에 맞게 설계된 ‘퍼블릭 포럼 디베이트’를 통해 토론교육을 보편화시킨 것.
대구교육청이 독서 정책을 통합·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전담부서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한 교장은 “2007년 장학사·파견교사·사서 등 3명이 팀을 이뤄 독서와 학교 도서관 업무를 봤다”면서 “2011년 전국 최초로 독서 전담 장학사를 뽑아 체계적인 정책 구상, 연수 등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독서나 글쓰기 분야의 전문가가 먼저 철학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중장기 정책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추진하려는 의지를 갖는 게 필요합니다.”
△황춘임 전주독서동아리연합회장
전국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규모의 전주독서동아리연합을 이끌고 있는 황춘임 회장(55)은 전북의 책읽기 문화에 대해 “ 독서를 위한 인적·물적 인프라는 충분하지만, 학교 현장은 제자리걸음”이라고 진단했다.
“전주독서동아리연합을 찾는 이는 그나마 책을 읽겠다는 의지가 있는 분들입니다. 독서 모임을 만드는 일이 거창한 것도 아니고 마음에 맞는 이들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죠. ‘맞춤형 독서 동아리 만들기’를 통해 독서가 단순한 취미가 아닌 평생학습의 차원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입시 성적을 위해 학생들에게 책읽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대세라고 말했다.
“학교 사서 도우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 도서관에 상당히 많은 책이 비치되어 있지만, 도서관을 이용하는 아이들은 한정돼 있다고 합니다. 또 책의 종류도 동화나 판타지에 치우쳐 있고요.”
황 회장은 그 원인을 “전문 사서가 있는 학교가 거의 없다”는 데서 찾았다. 전문 안내자가 없이 책 읽기가 이뤄지다 보니 흥미를 갖지 못하고 학교 공부의 연장선으로 여기고 부담을 갖는 아이들이 많다고 봤다.
“더욱이 독서동아리나 토론동아리는 소수 우수 학생들에게만 기회가 돌아가는 실정입니다. 전주교육지원청이 진행된 디베이트 반만 하더라도 보통 우수학생 8명 정도로 구성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소수 엘리트 교육’ 보다는 모든 학생들을 위한 ‘보편 교육’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윤일호 장승초 교사
윤일호 진안 장승초 교사(44)는 “‘글짓기’만 양산하는 ‘글쓰기 교육’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단언한다. “학생들이 마지못해 쓰거나 대회 입상을 위해 쓴 글이 대부분”이라는 그는 “글의 체계는 갖췄을지언정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는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독서·글쓰기·토론교육을 수업과 접목시키기가 수월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는 “학교마다 편차가 심하다”며 “그나마 혁신학교는 학교별로 수업 연구를 하면서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학생·학부모·교사 간 삶을 꿰뚫어볼 수 있는 독서·글쓰기 교육을 위해 교사 대상 연수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2009년 스승의 날 특집 방송에 소개된 초등 학생의 글을 꼽았다. 그 학생은‘밤 열시부터 교사가 무엇을 하는지 나왔다. 교감이 되려고 교장의 취미를 알아서 같이 하러 다니고 공문이나 해결하러 다닌다. 학생을 잘 가르쳐서 교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장에게 잘 보여서 교감이 된다. (중략) 나 같으면 교감 안 하겠다. 그리고 선생이나 계속하겠다’고 썼다.
그는 “6학년 학생이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세상”이라고 지적하면서 “글쓰기를 통해 학생과 소통하면서 학교교육의 믿음을 회복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3년 작고한 고(故) 이오덕 선생이 말했듯 글을 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이 있는 걸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천호성 전주교대 교수
천호성 전주교대 교수(48)는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수업분석을 연구하는 몇 안 되는 권위자로, 독서·글쓰기·토론교육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수업에 대한 이해는 학생·교사·교육내용에 대한 이해와 함께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학생과 교육내용 관계에 대한 이해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업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독서·글쓰기·토론교육을 통한 수업 혁신 혹은 자기 주도적 학습이 한계에 부딪치는 건 복합적인 이유라고 분석했다.
“일단 학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교사들이 수업에 대한 전문성이 요구됩니다. 솔직히 지금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교사 양성과정이 다양한 수업방법이 가능한 전문성 있는 교사를 양성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강의하고 있는 수업분석과 같은 교과목이 대학교육과정에 설치돼 있는 경우도 매우 드물고 실제 운영할 수 있는 교수도 매우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그는 입시 중심의 교육 시스템도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점수화된 내신 성적과 수학능력시험 결과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입 전형이 바뀌지 않는 한 효율적으로 점수를 높이는 수업 방식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1세기 미래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떤 지식인가 생각해보면 글쓰기와 토론수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과서를 신성시 여기며 진도에 얽매이는 수업, 학생들이 쉽게 암기할 수 있도록 죽처럼 잘 만든 암죽식 수업, 지식 중심의 설명식 수업을 탈피하고픈 생각이 있지만, 그 방법이 막막하다는 교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교단에서 글쓰기와 토론수업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주제 중심의 수업 연수를 뒷받침한다면 변화가 있을 거라 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