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선운산 자락에 선운사가 있다] 속세 벗어나 천천히 오르는 산길…부처의 진리를 엿보다

▲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

선운산을 넘어 선운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선운산과 소요산 사이 풍천장어집이 즐비한 길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다. 그리고 심원에서 질마재 길을 따라 참당암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길은 해리에서 낙조대와 용문굴을 지나 도솔암을 거쳐 가는 길이다.

 

저수지를 지나서도 한참 동안을 울창한 숲은 나타나지 않고 올망졸망한 나무숲들을 지나가는 길은 야생화가 지천이다.

 

땀은 온 몸을 적시고 나무 숲길은 눅눅하며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도 없다. 천천히 오르는 산길, 아직도 멀었는가 싶은데 눈 들어보니 능선이 저만치 보이고 능선에서 서쪽으로 조금 오르자 어느새 낙조대에 이른다. 변산 월명암의 낙조대나 불갑산 해불암의 낙조와 더불어 서해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선운산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사뭇 목가적이다. 해리, 무장, 법성포를 넘어 서해 바다는 아스라이 멀고 죽도 건너 변산반도의 풍광은 고적하고 포근하며 손만 뻗으면 닿을 듯 지척이다. 이 선운산의 본래 이름은 도솔산이었다.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있어 선운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몰이 아름다운 선운산 낙조대

 

선운산은 흔히 선운사의 뒷산인 수리봉(해발 342m)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1979년 전라북도에서 지정한 도립공원 범위인 선운계곡을 둘러싼 E자 모양의 산 전체를 선운산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가장 높은 경수산(444m)과 청룡산(313m), 구황봉(285m)개 이빨산(355m)이 독립된 산처럼 솟아있고 이 산에서 모인 물이 인천강(인냇강)을 이루어 곰소만으로 유입된다.

 

구름 속에 누워 선도를 닦는다는 뜻을 지닌 이 선운산은 바위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고려 때의 문장가로 산천 유람으로 한 평생을 보낸 김극기는 이 산에 올라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산 숲이 앞 뒤 사면을 둘렀는데, 한 족(簇) 천당(天堂)에 정거(淨居), 자수(紫綏)는 늘어진 것을 자랑하랴 현전(玄筌 : 현묘한 기틀)에는 다만 부처의 진리를 엿보고자 하네. 폭포소리 옥 부수듯 단풍진 골짜기에 울고, 산 경치는 소라를 모아 놓은 듯 푸른 하늘에 솟았네. 마주 앉아 조용히 옥진(玉塵)를 날리니 웃으며 이야기하는 끝에 맑은 바람 문득이네.”

 

해 떨어지기는 아직은 이르고 용문골로 내려선다.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급하게 서해로 도망가기 위해 뚫어놓은 것이라는 용문굴은 규모 면에서 대단히 큰 굴이면서 신기하기 짝이 없고 시원스럽다.

 

수없이 떠나고 수없이 돌아오는 그 삶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내가 선택한 이 선운산은 내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내 마음은 얼마나 다독거려 줄 것인가.

 

명나라 때의 문인 오종선이〈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관계를 허락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산행은 어쩌면 그리도 잘 맞아 떨어지는지, 용문굴에서 조금 내려가자 도솔암의 마애불 앞에 도착한다.

 

△선운사 마애불에 얽힌 사연

▲ 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불.

암벽타기를 즐기는 산악인들이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바위벽을 돌아가면 도솔암으로 내려가는 길 옆 절벽에 고려시대 초 지방 호족들이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 17m, 너비 3m인 이 불상 낮은 부조로 된 거대한 크기의 마애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양끝이 올라와 있고 입도 역시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부처님다운 부드러움이나 원만함이 없이 위압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누각 식으로 된 지붕이 달려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 속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져 왔다. 오지영이〈동학사〉에 기록한 비결 탈취 과정은 이렇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000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한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 살을 동봉해 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기 위해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 다는 것이다. 그 벼락 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지금(당시)부터 130년 전에 전라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중략)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란 글자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이 무서워 꺼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여래불

 

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한 밤 중에 마애불의 배꼽에서 그 비결을 꺼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바라볼수록 마애불과 잘 어울리는 한 그루 소나무를 뒤로하고 내원궁으로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르른 나뭇잎 새들이 손짓하는듯한 정경 속에 내원궁(內院宮)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선운사 지장보살 좌상이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지장보살은 관음전에 있는 금동보살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먼저 온 몇 사람이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만 있다. 그래 나는 저 내원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저 건너 산봉우리의 낙조대만 바라보고 있으니…

▲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왔다는 진흥굴.

도솔암에서 물을 마신 후 대나무 잎 새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내려가면 훤칠한 미남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장사 송을 만나게 되고 그 옆에 진흥굴이라고 불리는 천연굴이 있다.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곳 선운사에 와서 이 굴에서 자던 중 꿈속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이곳에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 절을 크게 일으키니 그 것이 선운사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국의 대표주 중의 하나인 복분자술

 

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한 가지를 떠올리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지만 나는 선운산의 꽃무릇을 떠올린다. 9월경에 선운산 골짜기를 시나브로 걸을라치면 가을나무들 새로 새빨갛게 피어난 꽃들을 볼 것인데 그 꽃이 꽃무릇이다. 또 하나 들라하면 선운사의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일 것이다.

 

이 산에는 ‘선운산가’라는 선운산과 관련된 백제 때의 노래가 전해온다. 백제 때 지금의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을 아우르던 장사현에 살던 사람이 나라의 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자 그 부인이 선운산에 올라가 낭군을 그리며 부른 노래인데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 남아있다.

 

선운 야영장을 지나 쉬엄쉬엄 걸어가자 선운사에 이른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 창건설화는 이렇다. 죽도 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 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이 있게 하리라’라고 쓰여 진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검단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선운사가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 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 등 4개의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십여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선운사 만세루는 강당으로 쓰이고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 앞에 보물 제 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운사 대웅전이 있다. 광해군 때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 계 맞배지붕인 이 건물은 측면에 공포가 없고 대신 높은기둥 두 개를 세워 중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조선중기의 건축으로 섬세하면서도 장식이 뛰어난 다포구성과 꽃 살 분합문이 화려하며 내부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대었으며 단청의 백화가 매우 아름답다.

 

이 절 관음전 안에는 성종 7년(1476)에 만들어져서 선운사가 모두 불에 탄 정유재란 때에도 화를 모면한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 279호인 이 불상은 대좌와 광배는 남아있지 않지만 15세기 경 보살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일제 때에 일본인이 훔쳐갔던 것을 1940년에 찾아와 이곳에 모셨다.

 

이절 뒤편에 이 나라에서 가장 소문난 것 중의 하나인 500여 년 이상 된 동백나무가 삼천여 그루 숲을 이루고 있다. 4월말이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가지 채 뚝뚝 떨어지는 눈물겹도록 가슴 시리고 아린 동백꽃을 볼 수가 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볼 수가 없다. 이 선운사에서 가까운 소요산 자락 질마재 아래 선운리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선운산 동백꽃에 대한 시 한 편을 남겼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선운사 동구(洞口)’

 

선운사를 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부도 밭에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선사 부도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진품은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모조품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고로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로 시작되는 이 비문을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탁본을 많이 해가 보기가 좀 민망했는데, 그것도 이미 옛일이다. 일주문을 나오는데, 어디 선가 선운산가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