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권의 시가작품들은 한결같이 여성의 정절을 테마로 한 망부가(望夫歌)류로 오로지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고 인내하는 망부의 미학을 주조로 하고 있다. 이들 작품 속엔 오지 않는 임에 대한 원(怨)이나 한(恨)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남편만을 믿고 따르는 아름다운 사랑만이 관류하는 여필종부의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불우헌 정극인의 작품은 모두 군신간의 전통적인 유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우헌가〉나 〈불우헌곡〉은 성종이 내린 삼품산관의 성은에 감읍(感泣)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세상사에 근심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는 가운데 즐거움을 찾는 낙이망우(樂以忘憂)의 미학을 노래하였다. 조선 가사문학의 효시작인 〈상춘곡〉도 그러한 가운데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미학을 바탕으로 세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 자연처럼 청정하게 살아가는 불우헌의 모습이 투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북 정읍의 칠보에서 창작된 불우헌 정극인의 가사 〈상춘곡〉은 전남 담양의 송순, 정철 등으로 이어져 ‘면앙정가단’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조 가사문학권의 산실이 되었다. 남원에서 창작된 현곡 조위한의 가사 ‘유민탄(流民嘆)’은 무능한 조정과 사대부들로 인해 왜란을 막지 못하고 나라가 초토화됨으로써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는 백성들의 한탄을 담은 작품이다. 광해군의 탄압이 극에 달한 탓으로 작품이 전해오지 않지만, 홍만종의 「순오지」에는 혼탁한 조정과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폭정을 고발한 것이라고 한 뒤, 정협의 ‘유민도’와 쌍벽을 이룬다고 하였다. 임란 이후는 사대부들의 전유물 같았던 가사문학이 시조장르와 더불어 평민 부녀자 등으로 확대되면서 시조장르와 더불어 국민장르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조 가전체소설에 이은 조선조 김시습의 몽유록계소설 「금오신화」는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으로 발전하여 〈춘향전〉과 허균의 〈홍길동전〉 등 고소설을 낳았고, 〈흥부전〉, 〈콩쥐팥쥐전〉 등으로 이어졌는데 이들 작품들이 이 고장을 중심으로 그 배경이 되어 창작되었다. 홍길동전은 부안 우반동 선계안골 정사암에서 허균이 집필했는데, 소설 속의 율도국이 위도라고 전해오기도 한다.
금오신화 속의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의 만복사를 배경으로 남원에 사는 양생이 귀신처녀와 결혼하여 살았다는 몽유세계를 그린 소설이다. 이는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초극하는 방법으로 꿈속 세계만이 유일무이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또 향가 〈서동요〉는 익산금마 미륵사를 배경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노래다. 미륵사 서탑의 복원과정에서 삼국유사의 이 설화가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문학적으로 화석화된 유사의 기록도 부정할 길이 없다. 고려 고종조 이규보(1168- 1241)는 최충헌의 인정을 받아 전주목에 부임한 뒤 전북을 일순하는 가운데 쓴 수필 〈남행월일기〉를 남겼고, 전북을 배경으로 한 60여수의 자연경물한시가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실려 유전되고 있다.
영조대 신경준(1712- 1787)은 「여암유고」 권1 시62제하에 145수의 시를 남겼는데 여암의 〈시칙(詩則)〉은 백성들의 어려운 삶속에서 우러난 민은시(民隱詩) 10장, 자연의 미물을 현미경적 관찰을 통한 야충(野蟲)과 소충(小蟲) 10장, 전통적인 한시의 형식을 깨뜨리면서 실질을 추구한 고체시 65수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 즉 그의 시칙은 구시대의 전통적인 시작을 답습하지 않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가운데 개성을 중시하였고, 하찮은 미물 속에서도 문학적 의미를 캐낸 시의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유고를 처음 발견한 정인보는 박학(博學) 무실(務實)의 선견을 지닌 신경준이 조정에서 귀히 등용되었다면 일찍이 왜란 같은 치욕이 없었을 것이며 조선이 일본보다 더 훌륭한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탄한 바도 있다.
이 외에도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에 불고정(不孤亭)을 짓고 ‘가사 10장’이라는 제하에 강호한정을 노래한 장복겸(1617- 1703)의 연시조 〈고산별곡〉, 정조 20년 삼례역승으로 좌천됐으나 임금을 그리며 지은 장현경(1730- 1806)의 가사 〈사미인가〉, 선조대 부안 매창(1573- 1610)의 한시와 시조, 영조대 남편 담락당 하립과의 이별과 해후 속에 빚어진 사랑과 그리움을 전통적 시형을 깨뜨리고 생산한 삼의당 김씨의 200여수의 한시, 고종조 마이산의 아홉 절경을 주자의 〈무이구곡가〉나 율곡의 〈고산구곡가〉의 형식을 빌어 지은 이도복(1882- 1938)의 가사 〈이산구곡가〉와 완주군 봉동면의 규방가사 〈홍규권장가〉, 〈상사별곡〉 고창군 대산면의 〈치산가〉 등 한국문학의 질량을 한층 끌어올린 한시, 시조, 가사 등이 모두 이 고장에서 생산되었다.
고종조 신재효는 광대가를 창작하며 소릿꾼인 광대가 갖추어야할 인물치레, 사설, 득음, 너름새 등의 네 가지 요소를 정립하고 종래의 12마당의 판소리 가운데 이선유의 5마당에 변강쇠타령을 넣어 를 6마당으로 개작하여 상층취향의 전아한 의취를 살려 판소리를 민족문학예술로 승화시켰다. 익산군 여산에서 태어난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시조는 전통적 시조장르에서 벗어나 실감실정을 표현하고 격조를 변화시키는 등 6가지 혁신론을 제시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립한 현대시조로 계승 발전시킨 공로자다. 그리하여 현대시조는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며, 자유시면서 정형시이어야 하고, 전통적인 틀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자유시가 되지 않는 점이 묘미라고 정의하였다.
그 결과 조선조의 2대장르 가운데 가사는 박물관화 되었더라도 시조장르만은 지금까지 현대시조시로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과로 보면 시조와 가사장르, 한시, 몽유록계와 판소리계 소설, 현대시조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 전반에 걸쳐 문학이론을 정립하면서 전북을 배경으로 많은 작품들을 배태하거나 생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광해군 때 왜란의 참상이 선조와 지배계층의 무능과 무대책의 결과이며, 그로 인해 힘없는 백성들이 유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발한 가사 〈유민탄(流民嘆)〉과 일본과 중국 등을 배경삼은 한문소설 〈최척전〉을 지은 현곡 조위한 , 연시조 〈고산별곡〉을 짓고 환곡제도를 통해 가렴주구를 일삼는 지방관리들을 고발하며 무위도식하는 유학자들을 각각 업유(業儒)와 업무(業武), 업농(業農)으로 나누어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무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구폐소〉를 올린 장복겸과 같은 도학자들이 있었다.
하찮은 곤충 등 미물들에게도 확대경을 들이대고 〈시칙(詩則)〉을 정립하며 지은 미물시와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대변한 민은(民隱)시를 쓰고, 민중을 위해 지리(地理)며 실용적인 기계와 기구를 만들고 박학과 무실을 실천했던 여암 신경준,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 힘입어 이석용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조선의 민족정기의 발원인 마이산을 배경으로 지은 이도복의 〈이산구곡가〉 등을 보더라도 이러한 인간중심의 휴머니스트들의 실천적 정신으로 인해 조선조의 문화가 세계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가람이 분류한 시가와 산문이라는 2대분류의 국문학 장르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문학의 원천은 모두 전북문학이 한국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거나, 한국문학의 중심축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해 왔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