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출발한다고요? 이제야 김치 담아 놓고 나물 준비하고 있는데, 어쩌지요? 알았어요. 어서 오세요.”
나의 전화에 당황하던 그녀가 화장도 못하고 정신없이 시계만 보며 두서없었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추 쌈밥에 제비집 구경을 시켜주겠다 해서 모두 부담 없이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심성대로 일을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직장 여인의 화장은 자존심이고 필수다. 조금씩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돌아와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연예인 수준의 분장을 하던 여성이라면 더더욱 엉뚱한 모습으로 달라질 수 있다. 그녀도 우리에게 민낯을 보이고 싶진 않았을 텐데, 우리는 기습을 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손수 뜯어다 말렸다는 더덕, 고사리, 삿갓나물과 미나리, 들깨 머위 탕, 그리고 작년 가을, 직접 쑤어 와서 문우들의 입을 호사시켰던 도토리묵 등, 자연 친화적인 온갖 음식들이 그녀의 손맛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홍어 삼합에 돼지등갈비 김치찌개, 소고기뭇국, 시래기 된장 지짐 등 그야말로 산해진미였다.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그녀의 민낯은 어느새 예쁜 그녀 본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바로 담가 먹어야 맛이 있어요.”
“이따 가실 때 한 포기씩 싸 드리려고 많이 담갔어요. 열두 시 넘어오시기로 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 담가 놓은 커다란 통속의 김치가 아침 내내 부산했던 열기에 발그레해진 그녀의 볼처럼, 고춧가루로 발갛게 버무려져 맛깔스러워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람? 손님을 초대해놓고 맘이 조급했을 텐데 무슨 여유로 이 많은 김치를 새로 담갔어? ” .
김치도 여러 종류가 식탁에 놓였다. 정갈한 밑반찬들이 입맛을 돋우었고, 내가 좋아하는 찰밥까지도 밥솥에서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밖으로 자리를 피해 준 그녀의 남편은, 내가 펼친 그 상에서 요즘 성서 필사(筆寫)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방의 필기도구들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나는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다. 여자 문우들이 상을 놓는 일에 모두 거들고 나섰다.
인정이 메말라 가고 이기적이고 편의주의로 내닫는 이 시대에 그녀의 정성과 따뜻한 마음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채반에 널려있던 버섯과 또 다른 산채들은 알뜰살뜰하고 부지런한 그녀를 닮아 햇볕에 건강한 먹거리로 말라가고 있었고. 텃밭의 상추와 아욱도 푸르렀다.
요즘 시골집에서조차 보기 힘들다는 제비집을 구경할 명분으로 우리는 모처럼 나들이를 계획한 것이었다. 골고루 싱싱하게 가꿔 놓은 채소밭과 그녀의 집 현관 벽에 둥지를 튼 제비집을 카톡 사진을 통해 보면서 반가워하던 우리를, 교수님과 함께 초대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제비는 그녀의 큰 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네 명의 딸을 둔 그녀의 첫 딸은 십여 년 가까이 고시원에서 적은 용돈으로 줄기차게 공부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도내에서 한 명밖에 뽑지 않는 기술고시1차 시험에 합격하던 날, 제비는 길운을 안고 이미 그녀의 집을 선택 했던 것이다.
착하고 성실한 흥부에게 큰 복을 주었던 제비는, 병석의 친정부모와 시부모를 봉양하며 효도를 다하고,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온 그녀를 눈여겨보고 복을 주기로 선택한 게 아니었을까?
나는 그녀가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글쓰기를 비롯한 많은 재능으로 보아 대학을 마친 여성으로 여겼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오십이 넘은 이제야 고등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반대로 고등학교 진학 기회를 빼앗겼던 그녀는, 결혼하여 낳은 딸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늦은 이 저녁에도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졸리는 눈을 비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낮에 일터에서 그녀를 만났던 고객들은, 그녀의 해바라기 같은 미소와 인정에 끌려 모두 행복했을 게 틀림없다.
천사, 정성려 문우님의 민낯은 오늘따라 화장했던 얼굴보다 정말로 더 예뻤다.
△수필가 김덕남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회원으로 돨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