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하늘만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버렸습니다.”, “40년째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어요. 한 해 한 해 무명 동학군의 무덤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김제 원평 구미란 유적지. 수풀을 헤치며 이곳을 오르던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김남근 구미마을(구미란) 노인회장은 걱정이 앞선다. 원평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현장이 날로 훼손되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거의 원평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평은 동학농민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교통의 요지기도 했고, 조선 말기 상설시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화가였다.
지리적 여건도 당시 지도부들이 모여 거사를 도모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원평 김덕명 장군 생가 동남쪽 상두산 자락을 넘으면 김개남 장군의 생가가 있는 정읍 지금실이다. 두 지역의 거리는 불과 20리가 안된다. 동학농민혁명의 거두인 이들이 혁명 이전부터 교류를 가지며 미래를 꿈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전봉준 장군의 활동 동선도 원평과 인연이 깊다. 원평취회를 통해 지도자로 급부상한 전봉준 장군은 이듬해 4월 원평에서 김덕명 장군의 세력을 규합,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또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전열을 가다듬은 장소이며,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된 곳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끈 농민군의 최후 항전지도 바로 이곳 원평이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원평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 바로 이웃 동네 고창·정읍은 전담부서까지 두고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소하게 들릴 뿐이다.
△구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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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남근 김제 원평 구미마을 노인회장이 구미란 전투 동학농민 무덤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
‘구미란 전적지’. 간단한 안내표지판 하나가 구미마을 뒤쪽 조그마한 야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남근 회장의 길안내가 없었다면 이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무명 동학농민군의 무덤으로 가는 길도 험했다. 무덤이 있는 곳은 해발 40여m 중턱에 지나지 않지만, 수풀을 헤치고 미끄러운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1년에 3번 실시하는 잡초 제거작업이 구미란 유적 관리의 전부다.
외형상 초라한 모습이지만 구미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끈 농민군의 최후 항전지기 때문이다.
신영우 충북대 교수는 구미란 전투를 “참혹했다”고 기술했다.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 진압군이 쓴 몇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전투상황조차 재구성할 수 없지만, 생존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본 구미란 전투는 참혹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단지 시체 37구와 쌀 500석 조총 등을 포획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일본군이 우금치전투의 희생자를 대폭 축소해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분석이다.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명의 농민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농민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농민군은 더욱 결사 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우금치에서 대패한 전봉준은 이 전투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고자 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재기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채 도피 길에 올랐다.
이 때문에 전주역사박물관에 있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유골을 이곳에 봉안해 추모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구미란 전적지에 대한 고증과 방치되고 있는 유적지에 대한 보존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목이 잘린 뒤 120년 동안 방치된 동학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 역시 김제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농민군무명묘역이 있는 이곳을 성역화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무산될 듯하다.
△원평집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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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붕괴 위기에 놓인 원평집강소를 보고 있다. | ||
동학농민혁명에서 집강소가 갖는 의미는 크다. 당시 농민들이 폐정 개혁을 골자로 국가를 대신해 행정, 치안 등을 직접 도맡는 것은 파격중의 파격이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철수한 뒤 전라감사 김학진이 농민군으로 하여금 집강소를 설치해 치안을 유지케 했다. 사실상 농민군 조직과 활동을 인정하고 향촌사회의 자치기능을 농민군들에게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농민군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김학진과 전봉준 장군이 전주성에서 회담을 갖고 관민상화의 원칙에 따라 대타협으로 전면 설치 운영됐다.
이에 따라 전라감영에 전라좌우도소가 설치됐고, 전라도 지역 53군에 집강소가 설치됐다. 당연히 전략적 요충지인 원평에도 집강소가 세워졌고, 현재는 민가에 설치된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다.
원평집강소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립한 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원평집강소는 수 십년 동안 방치 상태였다가, 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서야 겨우 문화재 등록이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김제지역기념사업회
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지난 1987년 모악향토문화연구회(회장 故최순식)에서 ‘김덕명장군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고 최순식 회장이 지내온 동학농민군위령제를 지난 1994년부터 구미마을(구미란전적지) 주민들이 마을행사로 주관했다.
위령제의 명맥과 기념사업을 위해 2008년 7월, 구미마을 주민들과 함께 ‘원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라는 명칭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뜻이 김제 전역으로 전해지면서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구성됐다. 12월 22일에 위령제와 함께 학술강연회를 진행하는 창립대회를 열었다.
2009년 3월 사단법인으로 승인되었고, 2010년 3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가 김제시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김제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사의 위상정립과 유적지를 보존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2009년부터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와 ‘구미란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주관해오고 있으며, 지난 5월 9일, 120주년 동학농민혁명과 금구원평취회 121주년을 기념하는 ‘다시여는 원평취회’를 개최, 올해를 기점으로 김제의 동학농민혁명 문화제를 매년 5월마다 추진할 예정이다.
2013년도에 동학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을 구미란 무명 동학농민군 묘역에 안장하기 위해 나섰지만 무산되었고, 구미란동학농민군무덤 발굴과 집강소건물 문화재 등록을 위한 절차를 진행했으나 문화재청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구미란 동학농민군무덤과 집강소건물의 토지와 건물 소유주로부터 동의를 얻어서 등록문화재 지정을 재차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