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몇 십 년 사이에 좋은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달라진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인간 내면에는 무인도에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가 있어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지만, 인간은 협업을 통해서만 상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에 대해 극도로 냉랭한 야수가 될 수도 있고, 정의감과 이타심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교육은 인간의 이러한 비결정성에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래서 백년지계 막여수인(百年之計莫如樹人)이라는 말이 시대를 초월해서 유효하다.
작은 목소리이지만,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인문학 부재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인문학 교육의 부재가 대한민국의 청년들을 체계적인 야수로 기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유달리 대형참사가 많은 편이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서해 페리호 침몰, 대구지하철 화재, 얼마 전에는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이 있었다.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세월호 사건은 여러 병폐가 누적된 것이지만 국민소득 2만불, 선진국 진입 등 성장우선주의 문화가 사회전반에 기조를 이루고 있던 탓이 크다.
지난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건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앵그리맘’으로 대변되는 40대 엄마들을 비롯해서 많은 국민들이 세월호의 슬픔을 자기 일처럼 느끼며 분향소로 줄이어 달려갔다. 국민 대다수가 슬픔에 빠지는 ‘집단 멘탈 붕괴현상’이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조그마한 위안이라면 그 사건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성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선장, 부패한 관료처럼 야수로 진화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 또한 많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와 인문학 부재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인문학이란 인간정신의 본질을 연구해 인간다움의 추구를 목표로 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인간다움이란 자신 앞에 닥친 현실 앞에 무조건적 수용이 아닌 ‘왜라고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과거에는 인문학이 일상생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이 접근하기 힘든 높은 선반 위의 골동품으로 치부되었다.
삶이 왜 허무한지, 인간의 욕망은 왜 끝이 없는지,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왜 불안한지…. 일상생활을 뒤흔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인문학적 생각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이 실용주의의 사회에서 인류 진화의 방향을 밝고 건강한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누구나 일상의 고민에 잠복되지 않고 자기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삶에 대해 왜냐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삶에 대해 왜냐고 질문 할 수 있는 한, 누구도 좋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나의균 총장은 전라북도 과학기술위원회 위원, 한국 원자력안전위원회 특별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