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백산에서 바라본 호남평야. | ||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호남평야다.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 펼쳐져 있는 이 평야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평야로 전주·익산·정읍·군산·김제 등 5개 시군을 비롯하여 완주·부안·고창 등의 군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호남평야,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평야가 동진강 유역에 펼쳐진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다. 만경(萬頃)은 말 그대로 가없이 펼쳐진 들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일컬어 금만평야라고도 부르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김제맹경 외 애밋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 애밋들’이란‘너른들’곧 호남평야를 일컫는 말이다.
호남평야에서도 가장 중심지에 있는 김제시의 백제 때 이름은 ‘벼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순수한 우리말인 ‘볏골’이었다. 한자음으로 벽골이라 해서 벽골군(碧骨郡)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에 지금 이름인 김제로 고쳐졌다.
△김제 부량면에 있는 삼한시대의 저수지 벽골제= “인심이 순후하여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라고 기록된 김제시에는 봉산들·봉남들·죽산들·청하들·만경들·백구들과 같은 비옥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홍수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김제맹경들에 배를 띄우고 고기를 낚았다’는 이야기까지 생길만큼 너른 평야였다.
오랜 옛날부터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이곳에 물을 대려고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저수지인 벽골제(碧骨提)를 만들었다.
벽골제가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옛 사람들이 김제의 옛 이름을 들어 그대로 ‘벽골제’라고 이름 했으며, 고을의 이름 역시 이 벽골제를 쌓은 뒤에 지금의 이름인 ‘김제’로 고쳤다고 한다.
|
|
||
| ▲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벽골제 수문. | ||
둑의 길이는 1800보(步)이며, 둑 안의 둘레는 7만 640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는데, 논이 모두 840결(結) 95부(負)이다.
물의 근원은 셋이다. 하나는 금구현 모악산 남쪽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하나는 모악산 북쪽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벽골제에서 모였다가 고부군 눌제의 물줄기를 부안현 동진에서 합쳐져, 만경현 남쪽을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 둑을 쌓았으며, 고려 때 다시 쌓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물이 말라 육지가 되어 백성들의 전답이 되어 버렸다. 다만 비석에 새겨진 기사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고부의 눌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호남평야의 3대 저수지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벽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저수지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도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축성되었다고 실려 있지만 그 무렵에 이 지역은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성한 것을 신라 연대로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원성왕 6년에 중축되었고, 고려 현종 때와 조선 태종 16년에도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백성들이 벽골제의 일부를 헐어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벽골제가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은 1924년부터였다. 아베라는 일본 사람이 김제읍과 진봉면 일대의 논을 사들인 뒤 아베농장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진봉면 서쪽의 바다를 막아서 간척지를 만들고자 했고, 자기 돈 백만 원과 일본 정부의 보조금 백만 원을 합하여 동진농업주식화사를 세웠다. 6년의 세월 속에 10㎞에 이르는 동진방조제라는 이름의 둑이 만들어지면서 논 2천 정보가 생겼다.
그 논에서 나온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고, 1949년에 그 일대가 따로 독립되어 ‘광활한 만주벌판’을 연상시키는 광활면이 되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식민지 시대에 수탈의 현장이 되었고, 현재 김제시에서 생산되는 쌀의 소출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의 40분의 1에 이르게 된 것이다.
△두 줄기 물이 감싸듯 하여 정기가 풀어지지 않는 곳= 나지막한 산들이 들 가운데를 굽이쳐 돌았던 호남평야 일대를 두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두 줄기 물이 감싸듯 하여 정기가 풀어지지 않아서 살 만한 곳이 대단히 많다.” 두 줄기 물길이란 호남평야를 적시고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만경강과 동진강을 이르는 말이다.
땅이 넓고 기름져서 풍요로운 땅 호남평야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나라의 곳간이었다. 이 지역의 풍흉의 결과에 따라 나라 살림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1935년 9월 동아일보에 이병기선생이 연재한〈해산유기(海山遊記)〉를 보면 그 당시 호남평야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무어라고 형용할꼬! 그 광활한 김제 만경의 평야며 백산평 궁안 삼천평 들이 삼면에 에두르고 한편에는 동진강 서해 그리고 점점이 건너다보이는 산과 산 그 빛들은 푸르고 희뜩희뜩 거뭇거뭇하고 또 그 무수한 변화되는 풍경은 잠깐 이렇게 해서 보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가슴이 넓어지는 듯 이러한 호기가 난다. 저 들판이 무비옥토, 해마다 그곳에서 나는 몇 백 만석의 곡식, 그런데도 왜 헐벗고 주리고 이리저리 유리 전전하는고.”
나라 안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더 팍팍했던 것은 그 무슨 연유일까?
지리학자인 최영준 선생은 〈국토와 민족 생활사〉에서 그 연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은 장기(獐氣)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라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거주하였다.(중략)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특이성을 고려하지도 않은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그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탐학과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다.
|
|
||
| ▲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는 단초가 되었던 만석보. | ||
호남평야는 그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들 수밖에 없는 천수답이 부지기수였다. 그 당시 3년 동안에 걸친 가뭄 때문에 전라도 전 지역 사람들은 살아가기조차 힘든 처지였다. 그때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동진강의 상류인 정읍천변에 구보(舊保)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석보를 만들고서 과중한 수세를 요구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한말의 문장가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증언한 내용을 보자.
“나라에서는 백성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가고 관리는 관리대로 농간을 부려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전북·충남·경기의 곡창 평야지대에는 버려진 옥토가 부지기수였다.”
참다 참다 못 참은 민중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조선이 역사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일제가 그 자리를 이어 받은 뒤 호남평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호남평야에 물 기근을 막게 한 섬진강 중류를 막아 우리나라 최초의 댐인 운암댐을 건설한 것이다. 1928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만든 운암댐은 바로 전라북도의 지세를 잘 이용한 대표적인 댐이었다. 동진강의 상류와 분수를 이루는 왕자산과 성왕산을 뚫어 유역을 변경한 뒤, 물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던 호남평야에 태인천을 통하여 정읍, 김제, 부안 등지로 내려 보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인들은 호남평야 일대가 쌀의 집산지임을 알게 되면서 고리대금업자들로 하여금 농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았다. 미야자끼. 나까니시, 구마모또, 가와사끼, 이시까와 같은 재력가들이 군산을 거점으로 삼아 큰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1907년에는 전라북도의 기름 진 논 4만 정보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생산된 양곡이 개항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갔다.
그 무렵 김제지역에 터를 잡은 사람이 아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세운 뒤 1924년에 간척지 제방공사를 시작해 둑을 쌓아 만든 농경지에서 생산한 맛 좋은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헐벗은 농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북간도로 줄을 이어 떠났고, 그때 아리랑 곡조에 실려 불렸던 노래는 이러했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까 보냐.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 북간도 벌판이 좋다더냐.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1940년에 신 댐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
그 뒤 1961년에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사이를 막아 1965년에 12월 길이가 344m 높이가 64m인 섬진강댐을 만들었고,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 칠보면 시산리까지 6215m의 굴(직경 3.40m)를 뚫어 칠보발전소를 만든 것이다.
한 맺힌 세월이 지나고 해방 이후 호남평야에 농지정리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전라도 옥백미(玉白米) 맛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즉 전라도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로 지은 맛있는 밥을 이르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맛있는 쌀의 대명사가 바로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던 쌀이었지만 지금은 그 명성을 다른 지역으로 넘겨주고 말았다.
이렇듯 국가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호남평야가 지금은 그 역할을 다른 여러 것들에 넘긴 채 넓은 평야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정치가로 정여립 사건 당시 희생되었던 이발은 김제 일대의 가을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한다. 들에 가득한 벼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
만물은 가고 만물이 다시 온다. 그러한 우주의 이치 속에서 오늘도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지평선으로 해가 진다. 그러나 제천의 의림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세월 속에 그 모습이 변형된 벽골제는 장생거를 비롯한 몇 가지 유물만 남긴 채로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벽골제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호남평야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만들 수는 없을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