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위기는 오래전에 찾아왔다. 사람들은 떠나고 두레와 품앗이 전통으로 지켜져 오던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면서 마을의 존재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마을을 해체한 것은 산업문명과 자본이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 그 어디에서나 마을은 여전히 존재한다. 존재는 하되 마을이 지녔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현실은 더 공허하다.
‘마을’을 살리자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다. 도시의 삶을 접고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을 살리기’는 농촌의 희망이 됐다. 그리고 10여년. 그렇다면 마을살리기 운동의 궤적을 딛고 선 오늘의 농촌마을은 다시 살아났는가.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봉곡마을의 이재철(44) 박후임씨 부부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귀농 9년차. 목사인 아내 박후임씨와 신학도였던 남편 이재철씨는 봉곡마을에서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봉곡교회의 행복한 노인학교를 운영하며 단절되었던 농촌 문화를 가장 ‘마을’ 다운 방식으로 복구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시에서 종교를 통해 나눔과 소통의 가치를 실천했던 부부는 땅과 자연의 소중함, 생명의 의미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오랫동안 안아 왔던 교회 밖 보이지 않는 목회활동의 고민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귀농이었다. 늦은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고 귀농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부부는 그러나 낯선 땅 진안에 터를 잡은 지 3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마을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 문화의 벽은 그만큼 높고 견고했다.
“그 벽을 없애는데 3년 걸렸습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농사일도 3년은 겪어봐야 몸에 들어온다고 하시더군요.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마음과 몸을 농촌의 삶으로 돌려놓는 일이 쉬웠을 리 없지요. 내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을 털어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안에서 그런 갈등과 다투고 풀어내다 보니 모든 탓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고서야 마을과 사람들을 얻게 되었죠.”
인터뷰는 여름 한낮, 봉곡마을의 마을박물관 안에 있는 행복한 노인학교 교실에서 있었다. 박물관이라고해야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 널찍한 교실과 복도가 전부지만 소박하게 전시실로 꾸며진 교실 안, 학선리 주민들의 생애사를 온전히 보여주는 온갖 일상용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전시품 중 새울마을 할머니가 내놓은 다리미의 설명글이 있었다. “나 수무살 먹어 시집올때 어머니가 해주셨다. 다리미다. 숯불 담아서 옷다려 이부라고” 할머니가 ‘삐뚤빼뚤’ 직접 쓴 글을 읽다보니 가슴 따뜻해졌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농촌에 들어오는 일이 어렵진 않지만 정착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들 합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마을과 떨어져 산다면 도시에서의 삶을 옮겨 살 수 있겠지만, 마을 안에 들어와서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갈등은 당연한 것입니다. 삶의 여정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니까요.”
-그런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생각하는 것,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니 불편이 따르더군요. 고민과 갈등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문화의 차이였어요. 낯설고 불편하고 어색했죠. 그런데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도 낯선 문화에 적응이 되어있더군요.”
-처음 귀농 하실 때 돈은 있었습니까.(웃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으면 좋겟지만 저희는 돈이 없었어요. 1000만원이 전 재산이었죠. 그중 500만원으로 중고 트럭을 사고 나니 500만원이 남더군요. 그래도 큰 불편은 없었어요.”
-귀농을 결심하려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이야기겠는데요.
“저희는 좀 특별한 경우일겁니다. 그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500만원으로도 성공 하지만, 어떤 사람은 몇 억을 가지고 있어도 안 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그 의지를 지켜 가느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에 가진 땅도 없었는데 농사는 어떻게 지을 수 있었습니까.
“2005년 9월에 빈집을 얻어 들어와 도배만 하고 살았어요. 가을에는 할 일이 없어 마을 어르신들 일을 도와드리면서 얼굴 익히는 시간을 가졌고, 겨울에는 골목길의 눈을 열심히 치우면서 지냈습니다. 마을 어른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덕분인지 논과 밭을 빌려주시더군요. 그래서 이듬해부터 천 평 정도의 천수답과 밭을 얻어 농사일을 시작했어요. 나름대로 친환경 농법을 시도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고구마는 멧돼지가 먹고 고추는 탄저병이 와서 안 되고, 논은 거름이나 논자재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보니 실패하고…….”
-농사일만으로 생활은 해결되셨나요.
“아니죠. 그래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어요. 그해 가을을 보내면서 두 사람 생활이라도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 했어요. 가계부를 정리해보니 매달 현금으로 50만원만 수입이 되면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어떻든 수입을 올릴 통로가 필요했겠군요.
“그래서 ‘더불어 식구’란 이름으로 회원을 모집했어요. 회원들이 매달 2-3만원씩 보내주면 50만원은 되겠다. 대신 농작물을 보내드리는 것이죠. 돈에 대한 등가의 개념이 아니라 많이 나오면 많이 보내고 적게 나오면 적게 보내는. 대부분 지인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공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20명 정도인데 잘 해결되고 있습니다.”
-회원을 더 늘리면 소득도 늘어날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너무 부담이 되니까요. 최소한의 수입만으로도 저희 가 뜻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족하죠. 작년에 집을 지어서 빚은 좀 졌지만 이 수준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집을 갖게 되었으니 재산이 늘어난 셈이군요. (웃음)
“땅 사는 일은 안하려고 했어요. 땅을 갖게 되면 묶이게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2007년 즈음 교회 분들과 마을 어르신들이 땅을 사라는 권유를 강하게 하셨어요. 땅을 사놓아야 ‘우리 동네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을 알고는 외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마을 일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사실 저희가 농촌에 온 이유는 마을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마을 안에 있는 빈집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어르신들과 농사일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농촌의 문제, 농촌의 현실, 마을이라고 하는 공간이 우리 가슴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렇다보니 마을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르신들이 잘 하지 못하는 일들, 가령 행정 업무나 서류 작성이나 마을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살리기도 그렇게 시작되었겠군요.
“그렇죠. 처음에 했던 일이 농촌개발사업인데, 공공부문 일을 맡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사고의 전환이랄까 어떤 물음이 생기더군요. 10년, 20년 후에 이 마을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그때도 이 마을은 존재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을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것에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오롯이 소득의 문제로만 보았어요. 도시에 비해 농촌에는 자본의 투입이 미미한데서 모든 문제가 이어진다는. 그래서 나름대로 소득사업을 추진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꼭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득사업을 하다보면 많은 갈등이 불거지더라고요. 이해관계가 첨예한 곳에는 갈등이 많잖아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건물 먼저 짓고 보조금만 일단 받고 보자는 그런 인식도 있고. 어느 사이에 마을의 어른들을 가르치고(?) 마을의 질서를 바꾸려는 마음이 강해졌어요. 기존의 질서에서 불합리한 예를 보면 무조건 뜯어고치려고 하는 마음이죠. 그 시기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일을 많이 하시는 만큼 어려움도 커졌겠습니다.
“다행히 깨달음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내가 없었어도 이 마을은 10년 전, 50년 전에도 존재했었다는. 나름대로의 삶의 모습과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어르신들의 삶을 제대로 보게 된 것 이예요. ‘참 오만했구나’하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엇을 열심히 바꾸려고 하지 않았어요. 원인을 들여다보면 문화의 차이였거든요. 대개 귀농한 분들이 갈등을 겪는 이유는 농촌을 도시의 관점으로 보려니 그런 겁니다.”
-결국은 시간이고 기다림이지 않을까 싶군요.
“농촌에서는 시간의 간격을 길게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살다보니 마을 어르신들의 삶이 훌륭하더군요. 남들이 다 떠날 때 땅을 지키면서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을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을을 지키고 있는 분들의 삶은 존경스럽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도시에 있는 교인들보다 훨씬 더 천국에 가까이 있는 삶을 산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행복한 노인학교나 마을박물관을 열게 된 동력이 궁금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삶에 존경심을 갖게 된 것이 동력이랄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알게 모르게 ‘나는 배우지 못해서 남아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삶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사회에서 농촌은 영향력이 없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시장경제로도 농촌은 효율성이 낮은 대상이죠. 그러나 한국사회가 어떻든 간에 마을 어르신들 스스로의 삶에 사랑을 부여해줄 수 있는 방식이 절실했습니다.”
-노인학교는 박목사님이 주도하셨죠.
“봉곡마을에 자리 잡고 3년쯤 되면서 남편은 마을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농사일이 좋고 그것만이 내일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저도 서서히 마을이 제 안으로 들어오면서 남편이 할 수 있는 마을의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마을의 일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저는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어요. 행복한 노인학교를 하면서 어르신들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죠. 특히 할머니 이야기반을 만들고 한글반을 운영하면서 어르신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았어요.”
-마을 박물관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마을 박물관을 제안 한 것은 이곳에 살고 계신 분들이 스스로 삶의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매개체가 뭘까 고민하다가 박물관을 생각했죠. 처음에는 사진을 모아보자고 시작했는데, 마침 귀농귀촌인 지역사회 기여사업에 공모를 해서 150만원을 첫해에 지원받았어요. 처음부터 큰 사업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학선리 마을의 100여 가구를 대상으로 했는데 사진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나절이 걸리기도 했으니까요. 사진을 수집하다보니 어느 집에선가 방치된 생활용품이 눈에 띄었어요. 장롱에서 사성이 나오기도 하고, 헛간에서 베틀이 나오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박물관이 채워졌지요.”
-마을박물관 일을 해오시면서 얻은 가치가 적지 않겠습니다. 주제가 ‘오래된 기억 미래를 열다’ 이던데요.
“배운 것이 많지요. 처음부터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박하게 시작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이곳 마을 박물관을 통해 어르신들과 그 후손들이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날 수 있는 매개체,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살리고 싶었죠. 여기서 도시는 출향인들을 뜻합니다.”
-박물관 운영이 장기적으로 볼 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우선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고요. 그냥 볼거리로 남아 있는 박물관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내용을 채워넣어야죠. 노인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은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우선은 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부부가 지은 흙집을 들렀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한 스트로베일하우스라고 했다. 에너지 자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생태건축물인데, 그 건축가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귀뜸해주었다. 귀농귀촌인진안군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아내와 영농회장을 맡고 있는 남편은 이제 귀농이란 틀이 자연스럽지 않을 만큼 온전히 봉곡마을의 주인이 됐다. 마을의 미래를 위한 일에 그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삶을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 이재철·박후임씨 부부는 서울 구로공단 목회활동 나눔과 사랑 실천
이재철 박후임씨는 진안에서 새로운 삶을 꾸린 귀농 9년차 부부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남편 이 씨와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아내 박씨는 2005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안에 터를 잡았다. 부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목사였던 아내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남편은 추구하는 종교적 가치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신뢰를 갖게 됐다. 삶의 지향이 같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96년 목사가 된 박 씨는 서울 구로공단의 새터교회에서 17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구로공단 주변의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었다.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추구했던 그는 어린이집이나 공부방 등을 통해 나눔과 사랑을 실천했다. 목회 10년째, 의식의 변화가 밀려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주말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연과 함께 할 때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으로부터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아이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나 잘 짜인 조직이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주목하게 됐다. 안식년을 맞은 해에 처음 교회 밖을 나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문화를 만나면서 지금껏 경험했던 신앙의 폭을 넓혔다.
그는 신학공부를 하며 이웃 간의 대화, 종교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남편을 만나 2004년 부부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목회를 통해 본질적인 삶의 문제와 가치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은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귀농은 이들 부부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뉘일 땅을 찾기 위해 강원도부터 해남 땅끝 마을까지 각 지역을 돌아다녔던 부부는 지인의 소개로 진안에 빈집을 얻어 정착했다. 귀농의 삶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와 농촌 문화의 경계는 높았다. 그 경계를 허물고 온전히(?) 마을사람이 되기까지는 꼭 3년이 걸렸다. 빌린 땅에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의 길도 마련했다. 지인들을 중심으로 ‘더불어 식구’ 회원을 만들고 쌀과 작물을 나누면서 기본적인 생활비를 해결했다. 3년이 지나면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농촌의 현실이 부부의 삶 안에 들어왔다. 남편은 농촌개발사업을 비롯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맡고 나서고 아내는 마을의 어르신들을 위해 ‘행복한 노인학교’를 제안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마을의 역사를 담는 박물관도 열었다. 지난해 이들 부부는 집을 새로 지었다. 이제 부부는 더 이상 ‘언젠가는 떠날 외지인’이 아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을 실현하고 싶다는 부부의 미래는 몇 십 년 후에도 건재 하는 농촌 마을의 존재에 놓여있다. 이들의 농촌살리기 운동을 주목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