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길, 국민 삶에 녹아내려야

▲ 이석현 국회 부의장
멋들어진 가을 풍경을 담기 위해 인사동 화방에 들려서 비싸고 질 좋은 붓과 물감들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넓은 거실에서 시원하게 에어컨도 켜 놓고 고상한 클래식 음악도 배경으로 깔아 놓는다. 물론 옆 탁자 위에는 은은한 향이 일품인 헤이즐럿 커피도 한 잔 준비해 놨다. 자 이제 그림만 그리면 된다. 하지만 큰일이다. 가을 풍경이 집에서 보이질 않는다. 상상으로 그릴 순 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똑같은 장면만 떠오른다. 결국 늘 그리듯이 똑같은 구도의 똑같은 색감으로 그림을 그리다 붓을 놓고 만다. 그것도 마무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국민 눈높이 맞춘 생활정치 절실

 

얼마 전 7·30 재보선에서 야당은 국민들로부터 거듭나라고 심판을 받았다. 국민들은 야당에게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불합리를 과감히 비판함과 동시에 그 불합리함을 변화시킬 미래의 그 무언가를 알려주고, 실천하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야당은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주 비싸고 질 좋은 재료들을 다 구비해 놓았지만 정작 우리는 하얀 도화지 위에 제대로 그리고 못한 형국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7·30 재보선 패배 이후 안타깝게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조용히 물러난 손학규 전 대표가 늘 이야기했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준비된 대통령’이란 선거구고 이후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어젠다(agenda)가 우리 정치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기가 막힌 말이라고 생각한다. 7·30 재보선 이후 패배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야당 내외에서 나오고 있다. 강한 야당의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공천에 실패해서 등등 하나같이 야당이 새겨서 다음 선거에 대비해야 할 지적들이다. 하지만 난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생활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국민 눈높이 전략을 짜지 못해서도 커다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국민들에게 ‘왜 야당에게 투표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하고 인사 참사, 세월호 참사 등 현 정부의 불통과 무능에만 기댄 전형적인 20세기형 선거전략이 패배의 원인이라는 일부의 지적에 동의한다. 문제점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국민들이 야당을 선택하면 ‘야당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이러한 나라다’는 그림을 국민 앞에 내놓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겐 먼 이야기 할 것도 없이 절체절명의 위기가 많았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한국전쟁의 잿더미에서, 경제참사라고 불리는 IMF 시절을 지나 지금까지도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온 우리 부모님이 계시던가. 그렇게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을 물려주고자 정작 본인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포기하고 살아온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저녁이 있는 삶’인 것이다.

 

단순하게 저녁에 집에서 쉬는 것이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경제적, 정신적 삶의 여유를 가지게 하는 것의 함축적 의미라고 난 생각한다. 그 경제적, 정신적 삶의 여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사회, 합리적인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 등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저녁 있는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 꿈이 없는데 어찌 현재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군인도, 경찰도, 아이들도 ‘저녁이 있는 삶’이 항상 꿈이어서만은 안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으려면 제도적, 사회적으로 ‘저녁이 있는 삶’의 길로 가야한다고 믿는다.

 

야당 위기·두려움 이겨야 민심 얻어

 

관객 천만을 넘긴 영화 ‘명량’에는 많은 백성들이 묵묵히 이순신을 믿는다. 12척 배로 울돌목 바다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이긴 이순신을 향해 백성들은 먼발치 육지에서 큰 절로 이순신에게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두려움은 몇 배 더 큰 용기가 될 수 있다”라고 ‘명량’은 이순신의 말을 빌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지금 야당은 위기다. 위기가 심해지면 패배주의에 빠지는 두려움으로 변화할지 모른다. 이 위기와 두려움을 이겨낸다면 그것은 용기가 되고 결국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된다고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