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북서부 동학농민혁명 새롭게 조명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예천·상주 등 기록 자료 공개…학술대회 발표 / 농민군지도자 자서전〈학초전〉 당시 상황 생생 / 〈소모사실〉 지역 농민군·전봉준 간 관계 확인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예천·상주·김천 등 경상도 북서부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새로 공개돼 이 지역 관련 연구에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김대곤)이 예천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남긴 <학초전> 과, 상주·김천지역 농민군 진압과정을 기록한 <소모사실> 자료를 확보해 공개했다.

 

경상도 북서부 지역은 전라·충청과 인접한 곳이어서 동학농민군 활동이 경상도에서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곳이지만, 1차 자료가 거의 발굴되지 않아 학계의 연구물이 거의 나오지 못했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학초전> 은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가했던 예천지역 농민군 지도자 박학래(1864~1942)의 자서전으로, 경상도 북서부지역에서 처음 발굴된 동학농민군측 기록이라는 점에서 예천지역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고 신영우 충북대 교수가 밝혔다.

또 김산소모영에서 작성한 <소모사실> 은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소모영에서 작성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상주와 김천의 농민군 활동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라고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 연구조사부장은 평가했다.

 

이들 자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한국사연구회(회장 신영우) 공동 주최로 26일 상주문화회관에서‘새로운 자료를 통해 본 경상도 북부지역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 <학초전> 으로 본 예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새로 발굴된 <학초전> 을 분석한 신영우 교수는 1894년 예천일대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과 집강소(경상도 북부지역 집강소는 전라도 집강소와 달리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기구)를 함께 검토해야 하는데 주로 진압군측 자료를 토대로 그 시각에 의해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새 자료의 가치를 부여했다.

 

“ <학초전> 발굴로 예천의 동학농민혁명은 30년만에 새로운 연구가 가능해졌다(신영우 교수는 1984년‘1894년 영남 예천의 농민군과 보수집강소’논문 등을 통해 경상도 북서부지역 농민군 활동을 발표했다). 특히 동학농민군의 시각에서 본 여러 서술 내용으로 사실 자체의 교정이 가능해졌다.

 

동학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고, 군사조직으로 전환한 뒤 각기 무장을 하고 봉기하였다. 양반과 향리 그리고 평민과 노비 등이 함께 참여한 것은 물론 지주에서 흉년에 굶주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즉 특정계급만의 항쟁이 아니었다. 하지만 향촌사회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폭발하면서 반상과 관민 간의 대립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농민군측 자료를 통해 검증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그 단서를 <학초전> 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는 게 신 교수의 해석이다.

 

신 교수는 실제 <학초전> 을 통해 당시 영남북서부 일대 농민군지도자의 신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즉, 조사 가능했던 지도자 21명 중 양반신분이 17명이나 됐고(상급양반 7명 포함), 경관직을 지낸 인물과 진사 명가 출신도 포함됐다는 것. <학초전> 의 필자인 박학래도 예천에서 양반 신분이 확인됐다.

 

<학초전> 에서는 또 1894년 봄에서 여름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군이 향촌사회의 실권을 장악했던 사정을 잘 전해주고 있으며, 동학농민군의 도회(都會)에서 나온 말들을 자세히 기록해 당시 농민군 상황을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일본군 부관 다케노우치 대위가 이 지역 도회를 염탐하다가 피살된 사건도 국내 자료로는 처음이라고 신 교수가 소개했다. 일본군의 증파를 결정한 계기가 된 이 사건과 관련, 필자는 일본군 대위가 피살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으로 기록했다.

△ <소모사실> 과 상주·김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김산소모영에서 작성한 <소모사실> (召募事實)은 이병규 재단 연구조사부장이 분석했다. “그동안 김산소모영의 존재와 활동이 단편적으로 알려졌지만, 새로 발굴된 이 자료는 김산소모영이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지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부장은 “김산소모영이 설치된 가장 큰 이유는 북접농민군이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설치됐다. 북접농민군이 유입될 경우,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울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산소모영은 또 규율을 정하고 지역민들을 10가 작통을 통해 통제한 사실이 기록됐다”고 소개했다.

 

<소모사실> 에서는 농민군 토벌과 관련, △병기를 납부하고 귀가할 경우 살려 줄 것 △1도의 거괴를 참하는 자는 상금 1만냥을 주고 수령으로 치하할 것 △감히 통문을 돌려 둔취하는 자들은 죽인다 △거괴를 은닉하여 고하지 않는 자는 죽인다 등의 기준도 나와 있다.

 

이와 함께 1895년 1월19일 중앙에 보낸 보고문에는 “동괴 접주 12명을 잡아 죽인 연유는 전에 이미 보고 하였습니다. 남홍언, 편사흠은 포를 거느리고 작년 8월 이후 크게 세력을 떨쳐(중략) 이 뜻으로 크게 개남처란 곳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순, 김원창은 곧 전봉준의 폐부에 해당하는 거괴로서 영남에 출몰하여 기포를 독려하는 자들입니다.(중략)”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그동안 관련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이 지역 농민군과 전봉준·김개남이 전봉준간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고 이 부장은 분석했다.

 

이병규 부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사건이자 동아시아의 전환을 가져온 거대한 사건임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학계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로 하여금 동학농민혁명 관련 새로운 자료가 지속적으로 발굴되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그 의미가 확산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