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북 보은 '북접 농민군 최후 전투지에 붉은 진달래 꽃 흐드러져'

교단본부 있던 보은취회서 척왜척양 외쳐 / 북실전투서 일본군에 의해 400여명 희생 / 충분한 역사고증 없는 기념공원 건립 홍역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일 년 전 동학교도들은 보은에 집결했다. 당시 민생은 파탄에 이르렀고 열강의 침탈은 날로 거세지고 있는 시기였다. 동학교도들은 보은취회에서 척왜척양을 외치며 왕실이 중심을 잡고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을 요구했다.

 

수 만명이 집결하자 왕실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했고 동학교도들은 왕실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좌초 직전까지 내몰린 왕실은 백성과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

 

보은취회가 열린지 일 년 5개월 만에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다시 보은에 모여 우금치로 향했다. 하지만 우금치전투에서 대패를 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보은에 돌아온 북접 동학농민군은 최후를 맞이했다.

▲ 북실 전투지(왼쪽)와 보은군 장내리 집회터. 집회터는 동학교단 본부가 있던 곳으로 1893년 3월 이곳에서 보은집회가 열렸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제2차 기포에는 북접의 동학농민군들이 집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진제공=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장내리 집회터

 

보은군 장내리 집회터는 동학교단 본부가 있던 곳으로 1893년 3월 이곳에서 보은집회가 개최됐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제2차 기포에도 북접의 동학농민군들이 집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1892년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자를 울린 동학교단은 1893년 2월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했다. 다음 달에는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척왜척양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동학 지도부가 장내리를 취회지로 결정한 이유는 삼남 각지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고, 속리산을 포함한 소백산 줄기를 타고 경상도와 강원도로 피신하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장내리 집회에는 약 2만3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 척왜양운동을 전개했다. 이곳에 모였던 교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하다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보내는 등 효유하자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해산했다.

 

장내리는 동학농민혁명의 2차 기포에서도 많은 농민군들이 집결한 곳이다. 1894년 9월 18일 청산에서 기포령을 내린 최시형은 휘하 두령들에게 군중을 인솔하고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로 총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북실 전투지

 

“북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는 붉은색 진달래가 많이 핍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붉은 피를 흘렸기 때문 아닐까요.”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인(원소기호 P) 성분이 많은 곳에 진달래가 많이 핀다고 설명했다. 몇 년 전 북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한 결과 인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됐다. 동물의 뼈·이 등에 주요 성분이 바로 인 이다. 실제 한 보고서에는 인 성분이 많은 토양에서 진달래가 잘 자란다고 기술한 바 있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다. 일본군은 전투 중에 총을 맞고 죽은 농민군의 수를 300여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학살한 농민군의 수는 의도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은 전투 중에 전주 도합 395명이 총에 맞아 죽고 골짜기와 숲속에 널려있는 시체가 몇 백 명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 외에 다른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최소 400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비해 일본군이나 민보군의 피해는 2명의 부상자만 나왔을 뿐이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지난 2007년 7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완공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건립 과정에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충북지역 시민단체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유적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제기하면서다.

 

실제 공원 입구에 세워진 기념물에는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 ‘1894년 8월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계획 세워’ 순으로 표지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박달한 사무국장은 “보은의 동학농민운동은 1893년 보은취회부터 시작됐다. 이 표지석의 설명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은 왜세의 침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면서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적 자발적으로 발생한 운동이며 결코 피동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봉기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김소촌 생가터

 

우금치에서 대패한 북접농민군은 일본군의 추격은 물론 매서운 추위와 싸워야 했다. 1894년 11월 27일 태인을 떠나 임실, 무주, 황간, 용산, 청산을 거쳐 다시 보은으로 몸을 피했다.

 

동학교주 최시형과 북접의 지도부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손병희, 배학수는 김소촌 가(金昭村 家)에 머물며 후일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일본군의 습격으로 다시 몸을 피해야 했다.

 

김소촌 가의 소촌은 어떤 인물의 호나 명이 아니고 소촌찰방을 지낸 김세희의 집이다. 그는 당대에 부를 이뤄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가 동학교도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유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구전으로 전해진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부를 이뤄낸 상황에서도 동학에 뜻을 같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손 김중구씨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일(일본군의 습격)이 있던 날 하얀 도포자락을 입고 마을을 떠났다”고 말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지난 1999년 창립한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구왕회)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참여자 후손에 대한 유족발굴에 전념해왔다. 또 지난 2007년 건립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활성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은관내 청소년 대상 역사체험 학습, 일반 관람객 대상 역사체험 학습, 역사해설, 나무공작 체험, 조선시대 민속체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 "차별없는 공동체 문화 꿈꿔요"

 

“동학은 일반 대중들의 보편적 정서였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어느 시대든지 일반 대중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일반 대중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에는 항상 동학의 정신이 함께 했다고 했다.

 

박 사무국장이 말하는 동학의 정신은 ‘함께 하고, 함께 나누며, 함께 잘 사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는 동학 100돌 무렵인 20여년 전부터 보은에서 생활문화공동체 ‘아사달’을 만들고 계승사업회 일을 시작했다. 100년 전 동학혁명의 시발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닫고 그 정신을 잇는 일을 하고자 귀향했다.

 

1893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처럼 박 사무국장은 새로운 꿈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차별없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깨달아 세상을 바라본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면서 “공동체 문화가 가장 잘 이뤄진 보은을 만들어 120년 전 동학농민군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