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선비정신 계속 이어가고
요즘 들어 새만금사업과 전주한옥마을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우선 새만금사업은 ‘한중(韓中)경협단지’라는 국내 최초의 초국적(超國的) 경제협력특구가 조성될 예정이어서 다시금 활력을 찾고 있다. 또 기본계획 변경과 함께 친환경 SOC 및 워터프론트 개발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착공한지 23년이 지나면서 피로감을 느끼던 차여서, 졸린 눈이 확 깨는 기분이다. 중국측이 얼마나 매력적인 투자처로 판단할지가 관건이긴 하나 국가 차원에서 나선만큼 기대를 걸어볼만 하다.
반면 전주한옥마을은 1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다 꼭지점을 찍은 분위기다. 2008년 방문객이 100만 명을 기록한 이후 해마다 100만 명씩 늘어나 열기가 뜨거웠다. 올해는 600만 명을 넘을 만큼 인기 절정이다. 하지만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라 했던가. 벌써 꽃 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위 ‘위기론’이 그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은 말할 것 없고 후발주자인 서울의 북촌과 남촌, 공주, 이천, 강릉 등이 전주한옥마을의 명성을 넘보고 있다. 아직 앞서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변신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다. 한 차원 높게 진화하기 위한 몸부림이 따라야 할 것이다. 어찌됐든 이들은 전북발전을 이끌고 있는 두 기둥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특히 정신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가치는 뭘까. 올곧은 선비정신과 온고지신을 통한 미래지향성이라고 생각된다. 그 연결고리는 한말의 거유(巨儒)였던 간재(艮齋) 전우(1841∼1922)다. 그는 기호학파의 끝자락을 장식한 마지막 도학자였다. 전주 청석골(지금의 다가동)에서 태어난 간재는 서울로 옮겼다 충청도 아산의 전재(全齋) 임헌회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친일파 오적(五賊)을 처형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서해 고도(孤島)로 들어갔다. 지금의 새만금지역인 왕등도, 신시도, 계화도가 그곳이다. 그때 나이 68세였다. 이것은 공자가 도(道)가 행해지지 않자 뗏목을 타고 다른 곳에 가서 도를 지키고 전수코자 했던 정신과 통한다.
이곳에서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15년 동안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이들 섬까지 가는 길은 멀고 풍랑이 심해 위험한 뱃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반도 곳곳에서 제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계화도에서 치른 장례식 행렬에는 무려 3000명의 제자들이 뒤를 따랐고, 참관한 사람이 6만 명에 이르렀다. 그의 국혼(國魂)을 지키고자 했던 선비정신과 항일의식 고취, 후학에 대한 교육열은 새만금지역의 정신적 횃불이 되고 있다.
그의 제자 중에 전주한옥마을과 관련 있는 인물이 3재(三齋)다. 3재는 금재(欽齋) 최병심, 고재(顧齋) 이병은, 유재(裕齋) 송기면을 일컫는다. 흔히 이들은 오늘날 전주한옥마을의 정신적 지주라 불린다.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지조를 지키며 일제에 항거하는 등 선비 본연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학문을 닦으며 미래의 등불인 후학 양성에 게으르지 않았다.
온고지신 통한 미래지향성 가져야
이제 새만금과 전주한옥마을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버전을 바꿔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다. 이런 때일수록 내재적 가치를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전주의 한옥마을, 전북의 새만금이 아니라 글로벌한 새만금과 한옥마을로 발돋움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