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사회에 웃음치료사라는 대체의학까지 등장을 했다면 웃음의 진가는 이미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그러나 웃음 못지않게 울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나는 얼마 전 아들과 함께 눈물로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붓고 체내의 수분이 모두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막힌 하수구가 뚫린 듯 심연에 고인 응어리가 풀려나갔다. 오랜 만에 묵은 생채기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눈물은 가슴과 가슴을 포개는 악수였다.
특히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배설 후에 오는 그 서늘한 명쾌함은 눈물을 배출해야만 맛볼 수 있다. 이는 희극보다 비극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인간의 정서에 더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카타르시스란, 고대 그리스어로 정화와 배설을 의미하며 체내에 축적된 불순물을 배출시키는 의학용어로도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인간은 비애를 맛봄으로써 마음속에 억눌린 정서를 순화시킬 수 있다했다.
눈물도 세 종류가 있다. 자극을 받았을 때 나오는 물리적 눈물, 기쁘거나 슬플 때 흘리는 감정적 눈물, 그리고 음악이나 그림에 감동 받았을 때 흘리는 영적인 눈물이 있다한다. 파브르는 이 세 가지 눈물을 분석한 결과 그 성분이 서로 달랐고, 세 가지 눈물을 그래프로 나타내자 가장 또렷한 흔적을 남긴 그림이 영적인 눈물이었다고 밝혔다. 탈무드에도 천국의 한쪽 구석에는 울고 싶은 사람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다한다. 그곳에 울음 방이 있다는 것은 영혼의 때를 씻을 때에도 눈물이 필요한 모양이다. 자신의 눈에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눈물에 밴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살다보면 슬프고 원통할 때 눈물이 나지만 가슴 벅찬 설렘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이처럼 눈물은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며 감성의 샘을 자극한다. 나는 가끔 책을 읽다가 주인공의 삶이 기막히게 아름다울 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눈물은 타인의 아픔과 절망을 보듬는 어머니의 품이다. 고단한 농부가 땀에 젖은 몸을 깨끗이 씻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지듯, 한 바탕 울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린다. 신은 마른 땅에 비를 내리듯 인간에게 눈물을 선물로 주셨다. 가뭄 끝 단비처럼 눈물을 실컷 흘리고 나면 영혼의 숲에 무지개가 뜬다.
그러나 사회변화의 속도가 가속화 되면서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눈물을 무익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해버렸다. 그러나 눈물 없이 채워지는 삶이 어디 있던가? 나는 타인 앞에서 박장대소를 하거나 결코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눈물을 감추고 아껴둘 만큼 감정이 무딘 사람은 아니다. 다만 바람이 잠든 새벽 가슴으로 운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으면 혈관에 녹이 슨다. 억압당한 마음은 울어야 풀리고 축적된 눈물을 쏟지 않으면, 소중한 가족조차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인생의 수레는 잠시도 요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희생과 눈물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생의 무대를 확장해 나간다. 아픔에 젖은 날들을 눈물로 채색해야 한 편의 시가 되고 순백의 향이 되리라. 강물이 흐르면서 스스로를 정화하듯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인간은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한다. 눈물은 순간의 통증을 해소하는 완화제가 아니라 고통의 뿌리를 제거하는 영혼의 대수술이다. 눈물이야말로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요. 지상에서 가장 순결한 언어가 아닐까?
△수필가 이명화 씨는 2003년〈문예연구〉로 등단. 수필집〈사랑에도 항체가 있다〉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