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남원역에 묻혀있던 남원성(축조 시기 미상, 조선시대 개축 추정)의 ‘북문 터’가 발견됐다.
북문 터는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1597년 8월) 당시 가장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이번 발견이 옛 남원역 활용방안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3년 5월,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남원시의 지원을 받아 옛 남원역 안에서 ‘남원성 북문 터’를 찾아내기 위한 측량을 실시했다. 이 측량작업에는 남원의 고지도와 철도청에서 제공한 옛 남원역 지적도가 동원됐고, 측량 후 4개의 지점에 ‘북문 터’라는 표식이 세워졌다.
측량결과 터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에 1개면은 9m 가량, 위치는 옛 남원역사에서 불과 20m 정도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꽃과 풀로 뒤덮인 땅에서 이뤄진 이 측량은 다만 추측에 불과했다. 실제 북문 터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를 던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본보는 지난해 5월13일자 보도(12면)에서 측량을 통해 찾아낸 북문 터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주문했다.
그 때로부터 1년4개월이 흐른 지난 9월20일, 드디어 북문 터를 고증하기 위한 시굴조사가 시작됐다. 남원시의 용역으로 실시된 이 시굴조사는 군산대 박물관(관장 김종수)에서 맡았다.
우리 선조들이 죽음으로 지켰던 남원성 북문 자리에 전라선 남원역(1931년 10월 중순 전주∼남원 구간 개통)이 건립되는 등 일제에 의해 사라진 ‘숭고한 호국정신의 장’을 되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일말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표식이 세워졌던 현장의 땅을 파헤쳐보니 굳고 단단한 기초석과 북문 입구가 나타났다. 옛 남원역에 묻혀있던 북문 터, 그 역사의 현장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성벽의 폭은 8.5m, 입구는 6m 정도로 보여졌다. 성벽 사이사이에서 조선시대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깨진 자기와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다.
지난해 측량을 주도했고 이번 시굴조사를 지켜보던 향토사학자인 한병옥(71·전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 씨는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때 전라 병사 이복남 장군 등 1만여명의 성민 대부분이 북문에서 순국했다. 당시 북문 옆 큰 구덩이에 시신들을 모아 함께 묻어 만인의 의로운 무덤인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만들었다”면서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확실한 북문 터가 확인된 만큼 숭고한 역사의 현장인 북문 복원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산대 박물관은 조만간 이번 시굴조사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할 예정이다.
한편 남원역은 2004년 8월5일에 현재의 위치인 남원시 신정동 531번지(교룡로 71)로 이전됐다. 철도가 시가지를 동서로 가로막아 남원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철도 운행이 중단된 옛 남원역사 부지(12만7216㎡)는 한국철도공사와 남원시의 소유다. 남원시는 현재 이 부지의 활용방안에 대해 고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