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도통리만 문화재로 지정 안돼
후백제는 892년 광주에서 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45년 동안 오월과 국제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오월에 한 차례의 사신을 파견한 것이 두 나라 국제외교의 전부였다. 918년 견훤은 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말을 실어 오월로 보냈다. 927년 오월 왕 전유는 감사의 뜻을 담아 반상서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전주에 파견했다. 견훤과 전유는 왕대 왕으로 41년 동안 양국의 국제외교를 이끌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국제외교를 가장 역동적으로 펼친 나라가 후백제다. 그렇다면 후백제가 오월과 반세기 동안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청자 기술이 후백제로 전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백제와 오월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가 우리나라 초기청자의 전파 루트가 아니었을까? 이제까지는 오월의 도공이 고려로의 망명이 큰 지지를 받았었다.
우리나라 초기청자는 오월의 월주요 도공들이 직접 파견되어 벽돌 가마를 만들고 청자를 구웠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도공이 중국에 가서 배워 온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에 청자 기술은 오늘날 원자폭탄처럼 국가의 최첨단 기술로 국가에서 직접 관리 운영했다. 오월도 국가 차원에서 월주요의 도공을 특별히 우대하고 후원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가마의 구조와 그 운영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중국은 벽돌 가마로 그 길이가 40m 이상 되는 대형이지만, 우리나라는 흙 가마로 20m 내외이다. 청자를 굽는 방식에 있어서도 중국은 딱 한번만 구웠지만, 우리나라는 초벌구이를 한 다음 유약을 바르고 다시 굽는 재벌구이다. 천하제일의 고려청자를 빚은 과학의 신비가 가마의 구조와 굽는 방식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
지난해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가마터 발굴조사에서 후백제와의 관련성이 제기됐다.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중국제 청자로 학계에 보고된 전주 동고산성에서 나온 초기청자도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다. 그런데 후백제가 갑자기 멸망함으로써 전주로의 공급이 끊기고 도공들의 강제 이주로 인해 후백제의 첨단국가산업단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도자문화 관광정책에 포함해야
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터는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대부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진안 도통리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일억 년 전 큰 호수였던 진안고원의 고령토와 조상들의 지혜가 만나 일궈낸 것이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부터 손내옹기까지 도자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요즘 마이산 개발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진안군의 관광전략이 발표됐는데,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를 관광정책에 꼭 포함시켜 관광활성화의 동력으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