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와 초기 청자, 진안 도통리

▲ 곽장근 군산대 교수
우리는 청자를 소개할 때마다 ‘고려’를 붙여 ‘고려청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를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꼽는데 어느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부터 청자 제작 기술이 들어온 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그 견해가 다양하다. 아마도 그 주된 배경으로는 중국 청자의 본향인 오월과 국제외교를 가장 왕성하게 펼친 후백제의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둔 오월의 월주요가 우리나라 청자 기술의 출발지라는 점에서는 모두들 의견을 같이 한다.

 

진안 도통리만 문화재로 지정 안돼

 

후백제는 892년 광주에서 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45년 동안 오월과 국제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오월에 한 차례의 사신을 파견한 것이 두 나라 국제외교의 전부였다. 918년 견훤은 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말을 실어 오월로 보냈다. 927년 오월 왕 전유는 감사의 뜻을 담아 반상서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전주에 파견했다. 견훤과 전유는 왕대 왕으로 41년 동안 양국의 국제외교를 이끌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국제외교를 가장 역동적으로 펼친 나라가 후백제다. 그렇다면 후백제가 오월과 반세기 동안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청자 기술이 후백제로 전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백제와 오월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가 우리나라 초기청자의 전파 루트가 아니었을까? 이제까지는 오월의 도공이 고려로의 망명이 큰 지지를 받았었다.

 

우리나라 초기청자는 오월의 월주요 도공들이 직접 파견되어 벽돌 가마를 만들고 청자를 구웠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도공이 중국에 가서 배워 온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에 청자 기술은 오늘날 원자폭탄처럼 국가의 최첨단 기술로 국가에서 직접 관리 운영했다. 오월도 국가 차원에서 월주요의 도공을 특별히 우대하고 후원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가마의 구조와 그 운영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중국은 벽돌 가마로 그 길이가 40m 이상 되는 대형이지만, 우리나라는 흙 가마로 20m 내외이다. 청자를 굽는 방식에 있어서도 중국은 딱 한번만 구웠지만, 우리나라는 초벌구이를 한 다음 유약을 바르고 다시 굽는 재벌구이다. 천하제일의 고려청자를 빚은 과학의 신비가 가마의 구조와 굽는 방식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

 

지난해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가마터 발굴조사에서 후백제와의 관련성이 제기됐다.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중국제 청자로 학계에 보고된 전주 동고산성에서 나온 초기청자도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다. 그런데 후백제가 갑자기 멸망함으로써 전주로의 공급이 끊기고 도공들의 강제 이주로 인해 후백제의 첨단국가산업단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도자문화 관광정책에 포함해야

 

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터는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대부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진안 도통리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일억 년 전 큰 호수였던 진안고원의 고령토와 조상들의 지혜가 만나 일궈낸 것이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부터 손내옹기까지 도자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요즘 마이산 개발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진안군의 관광전략이 발표됐는데,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를 관광정책에 꼭 포함시켜 관광활성화의 동력으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