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립미술관서 '컬렉션' 전시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이산의 삶 고달팠지만 미술 통해 세상에 보탬 되고 싶었다"

▲ 메세나 운동 선구자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이 아내 유창자씨와 함께‘하정웅 컬렉션 특별전’이 열리는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어린 시절, 궁핍한 환경에서도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민지 시대, 가난을 못 견디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교포 1세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일상은 그를 더 이상 화가로서의 꿈을 갖지 못하게 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어디에 가든 성실하게 일했다.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지만 나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생활철학이 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힘을 안겼다. 실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빚더미에 쌓인 전자제품 가게를 일으켜 세우면서 30대에 부를 이루었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처한 재일교포 작가들을 지원하고 싶었던 그는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까지 1만여 점 작품을 수집한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가 됐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작품들은 그의 것이 아니다. 모든 작품을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여덟 곳 도립 시립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메세나 운동의 선구자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75). 그는 미술품 기증으로 이름을 알린 재일교포 2세 화가이자 사업가다. 대기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로라하는 재벌 2세도 아닌 그가 재산의 대부분을 쏟아 수집한 미술품을 온전히 대한민국의 관립미술관에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침 하정웅 컬렉션을 기증받은 시도립미술관들이 지난해부터 특별한 전시회를 기획했다. ‘하정웅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기도의 미술’이다. 다섯 번째 순회전 차례인 전북도립미술관 전시가 지난 9월 19일부터 시작됐다. 전북도립미술관이 개관했던 초기, 재일교포 화가 손아유의 작품을 비롯해 200여점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그는 이 지역에도 아름다운 기증운동의 꽃씨를 심었다.

 

개막식 참석을 위해 아내 유창자씨와 함께 전주에 온 하 이사장을 만났다. 세 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그의 이야기는 칠십 여생 험난했던 인생노정만큼이나 격정적으로 굽이쳤다.

 

“명역역(明歷歷) 노당당(露堂堂). 좋은 일은 반드시 좋은 일로 돌아온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왔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쁜 짓 하지마라, 하늘이 다 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가르침이 제게는 신념이 되었는데, 덕분에 사회에 공헌하는 일에도 눈을 뜰 수 있었을 겁니다.”

 

이산(離散)의 고달픈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노년은 유난히 아름답고 빛이 났다.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는 삶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길은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리면서도 ‘좋은 일’에 마음을 두었던 그의 선택이 그래서 더 소중해 보였다.

 

- 전국시도립미술관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하정웅 컬렉션 특별전’에 남다른 소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정웅 컬렉션으로 지금까지 9개 관립미술관에 1만여 점 정도 기증해왔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기증운동을 하다 보니 관계자들이 소통하면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또 다른 보람을 갖게 된 셈인데, 제 컬렉션으로 지역과 지역이 교류하는 계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반가운 일입니다.”

 

-국내에서는 이 전시가 내년까지 이어지던데 일본 전시도 계획되어 있습니까.

 

“국내전을 마치면 일본 6개 도시 순회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재일교포들은 물론이고 컬렉션을 기다리는 미술애호가가 많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도시에서도 전시회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단순히 컬렉션을 과시하고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특별전에 기대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저는 컬렉션을 시작할 때 분명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가 중심이었죠. 맨 처음 재일교포작가들의 작품부터 수집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 세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10억, 우리 민족만도 700만 명 정도가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산의 삶은 위태롭습니다. 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기 일쑤죠. 저 역시 국적은 한국이지만, 삶의 터전은 일본인 ‘디아스포라’입니다. 미술을 통해 저와 같은 운명을 가진 디아스포라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면 세상에 이바지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을 때 재일교포작가 작품을 주목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부모님은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오셨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고단한 삶이었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특별한 일을 시켰어요. 마을 뒤편에 절이 있었는데 그 곳에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봉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명절이면 음식과 함께 저를 그곳에 보내어 절을 올리고 오라고 하셨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겠군요.

 

“제가 살았던 아키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아키타에 일본에서 제일 깊은 다자와코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이 호수에 댐을 만들고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그 현장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들이었어요. 그들 중에는 힘든 노동과 추위에 시달리다 도망치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무덤도 그들 중 누군가의 무덤이었겠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산의 아픔을 알게 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미술품 수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이름 없이, 그것도 내나라도 아닌 곳에 끌려와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운명이 강하게 와 닿았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턴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 그림을 모으기 시작할 때 이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목표가 분명했는데 왜 미술관 건립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미술관을 짓기 위해 땅도 사고 설계까지 마쳤어요. 호수 옆이었는데 제 뜻을 존중하고 환영하는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행정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 했죠. 그런데 그즈음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어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졌죠. 갑자기 상황이 경색되면서 미술관 건립을 환영했던 일본인들이 돌아서기 시작하더군요. 90년대 초반이었어요. 인연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접었습니다.”

 

-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수집한 작품도 많았을 텐데요.

 

“작품 양도 그렇지만 기도의 미술관을 위해 수집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쉬움이 더 컸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운이 돌아왔어요. 그 사이 땅값이 다섯 배로 오른 겁니다. 다 팔았죠.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요. 결과적으로 땅 투기한 셈이 됐습니다.(웃음)”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을 처음 기증한 것이 그 즈음 아닌가요.

 

“맞습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죠. 82년엔가 광주에 가게 되었어요. 전화황이란 재일교포 작가 작품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어 서울과 대구, 광주에서 순회 전시회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과로를 했던 탓인지 광주에서 쓰러졌어요. 일주일동안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회복되었는데, 그때 그 안마사가 부탁을 하더군요. 시각장애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마련을 도와달라고요.”

 

-그 분이 이사장님을 잘 알아보셨군요.(웃음) 그래서 도와주셨습니까.

 

“사정이 아주 절박했어요. ‘광주에만 2천명 이상 시각장애인이 있는데, 먹고살 기반이 없다. 자립을 못하니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짐이 되어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교육이라도 시켜 자립할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다’고 하는데 참 딱하더라고요. 나도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과의 인연이 있거든요.”

 

-어떤 인연인가요.

 

“고등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 그때 시각장애인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기차를 타고 내리는 것을 보며 감동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들과 친구도 되었고요. 그리고 저 역시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시력을 잃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돕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경제적으로만 지원하는 일은 의미가 없어 ‘먼저 당신들이 의지를 갖고 시작해보라’고 했어요. 200만원만 모금을 하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약속은 지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1년도 안되어 연락이 왔더군요. 모금운동으로 목표액을 만든 겁니다. 애초 약속은 30평 부지에 사무실 공간 30평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160평 부지에 120평짜리 건물을 지어드렸습니다. 장기적으로 이 공간의 활용도를 생각해보니 그만한 공간은 확보되어야겠더라고요.”

 

-광주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

 

“잘된 출발이었죠.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나서서 씨앗을 뿌린 셈인데 당시만 해도 그런 운동이 드물 때여서 모범적인 시민운동의 결실로 꼽혔습니다. 93년에 다시 광주에 갔는데 오승윤씨를 만나 광주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건물을 지어놓고도 소장품이 없어 전시회 하나도 제대로 기획하지 못하는 처지였어요. 50점 정도 기증을 부탁하더군요. ‘하정웅 컬렉션’ 전시실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어요. 일본으로 관계자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212점을 기증했습니다. 내 컬렉션의 출발이 된 전화황의 작품 92점을 비롯해 모두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광주의 정신과 맞는다고 생각했고,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어 가장 중심에 놓아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

 

-이사장님에게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귀한 작품들이었겠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기증한 예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 기증이 처음이어서인지 화제가 되었죠. 그런데 한편에서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기증한다더니 재일교포 작품만 했다고. 숫자만 많지 ‘쓰레기’ 같은 그림들이라고요. 기가 막혔습니다. 나를 이름이나 알리려는 졸부쯤으로 평가하는 것은 마음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작가들의 작품을 그렇게 평가절하 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안에 이우환선생의 작품도 있었다면서요.

 

“그 당시는 이우환씨가 아직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지 않은 때였죠. 이우환 작품이 당시 열 두 점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100호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거래되고 있으니 미술관으로서는 큰 자산이 됐습니다. 당시 ‘쓰레기’로 평가받았던 작품인데….(웃음) 기증한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문화를 알고 선택한 것들이에요. 역사적 맥락에서 가치 있다고 판단한 작품들입니다. 작품수나 외양만 보고 평가하는 일은 비문화적이죠.”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광주시립미술관에 여러 차례 작품을 기증하셨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2300점 기증했습니다. 한국 작가는 물론, 피카소 샤갈 달리 헨리무어 등 이른바 하정웅 컬렉션으로 불리는 작품들입니다. 광주시립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70퍼센트 가까운 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장품 기근을 겪고 있는 관립미술관들이 이사장님의 작품 기증을 기대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 같은 여건이니까요. 여력이 되면 돕고 싶었고, 그래서 기증운동이 확산된 것입니다. 특별한 계기도 있어요. 40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덕수궁 미술관에 갔어요. 그 건물이 이방자 여사가 살던 집이었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미술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고 역사적 공간에 미술관을 들여놓아야 하는 문화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소장품도 없었죠. 우리나라 역사를 4천년, 5천년 역사라고 내세우면서 변변한 미술관 박물관 하나 갖지 못한 현실에 정신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문화진흥을 위해 무엇인가 공헌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겁니다.”

 

-미술품을 수집할 때 어떤 기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컬렉터들은 아무래도 작품의 가치를 명망성에 두게 되지 않나요.

 

“저는 처음부터 역사적인 맥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와 같은 운명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역사성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수집한 작품들을 보면 아무래도 디아스포라 작가들이나 그런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습니다. 역사성을 반영하고 현실과 사회를 직시하면서 그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하는 그런 세계를 갖고 있는 작품들이죠. 그런 작품들이어야 관객들이 미술을 통해 역사를 읽고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 하고, 지향해야 하는가’를 인식하게 됩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시면서 문화 활동으로 헌신하는 이사장님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하실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배운 경험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매체 인터뷰 역시 그런 통로가 되겠지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도와주는 정신, 나누는 정신을 나는 추양(推讓) 정신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행복을 찾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회를 소망합니다. 하정웅 컬렉션은 그러한 기도의 철학이 바탕입니다. 그 취지를 살리는 일을 좀 더 오래 지속하고 싶습니다.”

하 이사장은 전주를 여러 차례 오고갔다. 전주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는 전주만의 문화 전통을 잘 지키는 것이 미래의 가장 큰 힘이라고 조언했다. 인터뷰 말미, 따끔한 충고도 더해졌다. “한옥마을이 참 좋았었는데, 어제 둘러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일과성 바람이랄까. 한옥마을다움이 없는 이상한 문화에 잠식되었더군요. 그런 바람은 정말 위험합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가 살아 있는 마을을 지키세요. 주민들이 나서야합니다.”

 

● 하정웅 이사장은 미술품 1만점 국내기증 재일교포 2세…메세나 운동 선구자

하정웅 이사장은 재일교포 2세다.

 

전남 영암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치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이고 동향인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갔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하루 벌이 노동으로 5남매를 키웠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고 명민했으나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할 생각이었던 그를 일본인 스승이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그래야 행세라도 할 수 있는 시대다.’ 아들이 전해준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가르치겠다’며 암거래 쌀장사로 학비를 댔다. 졸업만하면 일류회사 취직이 가능했던 명문 아키타 공업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교사가 아키타현 공모전에 그의 작품을 출품했다. 첫 출품에 입상의 기쁨을 안았다. 여러해 동안 출품하고도 번번이 낙선했던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니가 내 선생님이다.’ 그 말 한마디에 자존감을 얻었다.

 

졸업 직후 학교 추천으로 취업을 했다. 전기회사였는데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데다 적성도 맞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처럼 하루 벌어 사는 노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2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영양실조에 과로가 원인이었다. 3개월 동안 어둠속에서 지냈으나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조총련 조직에서 재일동포들이 인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해달라며 그를 불렀다. 4년 동안 온전히 동포들의 인권을 찾는 일에 매달려 살았다.

 

스물 네살에 재일교포인 윤창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즈음 조총련 조직과도 결별했다. 신혼살림을 마련하면서 인연이 된 가전제품 상점을 우여곡절 끝에 인수하게 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한해 앞둔 해였다. 전자제품 바람이 일본 전역에 불어 그의 상점도 성업이었다. 3개월 만에 떠안았던 빚을 갚고도 큰 돈을 벌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자신처럼 꿈을 갖고 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한 동포들을 돕기로 했다. 첫 대상은 재일교포 화가들이었다. 작가들을 지원하고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작품은 1만 여점. 피카소 샤갈 뭉크 앤디워홀 달리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부터 이우환 손아유 등 세계 화단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다. 그는 애초 일본에 의미 있는 미술관 건립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계획이 무산되고 난 후 지방도시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을 시작했다.

 

기증운동은 더 확대되어 한국의 웬만한 도립 시립미술관이 그로부터 적게는 수백점, 많게는 수천점의 작품을 기증받았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도 작품을 수집하고 기증하는 메세나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9년부터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최근 자신의 삶을 담은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