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종 앞둔 우리밀 단상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봄과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우리는 보릿고개라고 부른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쌀 뒤주의 밑바닥이 보일락 말락 할 즈음, 보리 수확의 간절함을 보릿고개라고 표현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 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동시 작가 박화목이 1970년대에 작사한 가요 ‘보리밭’은 우리 국민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한다.

 

정부가 외면한 밀농사, 농부들이 살려

 

보리를 소재로 한 노래만 있는 게 아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아궁이에 불 지피고 물이 끓는 사이에 만든 밀가루 반죽을 날렵하게 떼어내 차려준 수제비, 칼국수를 아련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는 밀도 있다.

 

‘밀밭길 울타리 사이로 조그만 오솔길 있네…’ 1980년 나온 가수 허인순의 노래 ‘밀밭길 추억’도 아련한 가슴 속 가장 자리에 묻혀 있던 옛 추억을 스멀스멀 피어나게 만든다.

 

보리밭과 밀밭.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면서 배고팠던 시절의 아픔도 자아내게 하는 마음 속 공간이다. 하지만 2014년 현재, 보리와 밀은 그 처지가 크게 다르다. 2014년 보리 생산량은 13만 712톤이다. 정부 수매가 폐지된 후에도 농협과 가공식품 업체 쪽에서 가져가기 때문에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는 예전에 비해 훨씬 귀하신 몸이 됐다. 하지만 우리밀 생산량은 2만 4000톤 정도에 그쳤다. 20년 전 거의 전무하던 것에 비해 엄청난 약진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정부는 1984년 밀 수매를 폐지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우리밀을 버리지 않았고,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우리밀 재배를 시작했다. 전북 김제, 부안 일대가 그 중심에 속한다. 결국 정부는 2008년 ‘제2의 녹색혁명’ 정책을 발표하면서 밀 육성책을 내놓았다. 2015년까지 밀 자급률 10%가 목표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식용 밀 소비량이 220만 톤 가량인 점을 고려할 때 목표 달성은 요원하다. 2014년 밀 생산량 2만4000톤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2011년 4만3000톤까지 생산됐으니, 최근의 밀 생산량은 전체 소비량의 1-2% 수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정부가 로컬푸드의 장점을 버리고 철저히 수입밀 정책을 고수한 탓이 크다. 민간이 밀 산업을 주도하고 있지만, 지난 20여년간 겨우 2만 톤 생산을 달성했을 뿐이다. 제조업 수출 위주의 정부 정책이 먹거리 기반을 위협하고, 국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수입밀은 지난 50여년 동안 우리 식탁을 점령했다.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70㎏까지 떨어질 때 밀은 35㎏까지 올라갔다. 밀은 대한민국 제2주식이다.

 

하지만 수입 농산물은 장기적으로 국민 건강에 유익하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소량의 친환경 농산물을 비행기로 운송하는 방식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화물선 편으로 장기간 운송되는 밀가루, 옥수수가루 등 곡물은 해충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약품 처리를 하기 때문이다.

 

로컬푸드 우리밀은 그야말로 텃논에서 나오는 동네 식재료다. 싱싱하고, 위해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크게 줄어든 식재료다. 그동안 일반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로컬푸드 밀가루 가격이 비싸 접근이 쉽지 않았다. 우리밀 가격이 과거 수입밀 대비 3배에 달했다. 하지만 요즘은 1.5배 수준까지 떨어졌다. 밀 생산농가가 늘어나면서 점차 가격 경쟁력도 갖춰가고 있다.

 

우리밀 살리기, 정부도 지원책 강구를

 

전북지역에서는 김제와 부안 등에서 우리밀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김제시우리밀영농조합법인 이재병 대표, 전남 구례 우리밀영농조합법인 밀벗의 최성호 대표 등이 우리밀 살리기에 노력해 온 결과다.

 

정부가 수십년간 외면했던 밀 농사가 농부들의 손길로 살아났다. 정부도 밀산업 육성에 고민하는 모양이지만, 현장에서는 우려 목소리가 나온다. 어렵게 살린 우리밀이 대기업 잔치가 될 수 있다는 낌새 때문이다.

 

10월 중순으로 넘어가면서 농부들은 바쁘다. 벼 수확한 뒤에는 밀과 보리를 이어짓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우리밀에 헌신한 농부들의 땀이 헛되지 않도록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