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후백제의 도성은 그 위용과 면모가 웅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0세기 전반 후삼국시대를 열었던 후백제는 삼국시대 이후의 왕조 가운데 유일하게 왕궁 터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됐다. 1960~70년대 이래 전주의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도성 흔적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후백제 도성의 전모를 밝히기 위한 일부 연구자들의 논의가 이어졌다. 그동안 후백제의 도성 위치와 관련해서는 반대산 일대의 고토성, 물왕멀 일대, 동고산성, 전주부성, 인봉리 일대 등 연구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제기됐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가 제시되지 않아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백제 왕궁 터를 물왕멀 일대로 추정했다. 도시화 이전의 전주 시내를 조사했던 일제강점기때 펴낸 <전주부사> 에서는 당시 물왕멀 일대(현재 중노송동)를 궁성으로 파악했다. 그 증거로는 궁성에 쓰였던 석재와 각종 기와·자기편을 제시했다. 전주부사>
이후 1980~90년대에는 동고산성의 발굴 성과가 드러나면서 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가 주장한 동고산성설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남고산성을 별개로 분리하고, 동고산성과 동정리 일대의 평지성을 연계해 상성과 내성, 중성, 외성으로 파악한 내용이다.
최근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인봉리 일대(문화촌)에 궁성이 있었고, 한때 인공 저수지의 제방과 공설운동장의 본부석으로 이용됐던 전주정보영상진흥원 뒤편의 토축을 궁성의 서벽으로 제시했다.
이처럼 후백제 도성은 궁성뿐만 아니라 궁성을 포함하는 도성 체계 등에서 연구자마다 의견을 달리하면서 논의가 좀처럼 진척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국립전주박물관이 29일 전주시 노송동 일대에서 후백제 도성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제기됐던 여러 견해와 학설들을 아우르는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것은 물론 도성 전반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특히 평지성의 실체를 밝히면서 성벽의 축조 기술, 도로, 시가지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해지는 등 후백제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에 따르면 후백제 도성은 북벽과 동벽은 연속된 구릉을 그대로 활용했고, 서벽과 남벽은 평탄 지대를 가로지르는 성벽을 거의 새로 쌓았다. 서벽의 경우 하천을 경계로 했고, 남벽은 일부 구간에 한해 독립된 구릉에 잇대면서 기린봉의 산자락을 성벽으로 대체하면서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하천과 구릉, 높은 산의 능선이라는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도성의 평면 형태는 자연스럽게 반월형을 이루게 됐다.
이처럼 남벽이나 북벽처럼 자연 구릉의 흐름을 타고 계속해서 성벽이 축조됐다는 가정 아래 과거의 인봉지 제방(현재 전주정보영상진흥원 뒷담)을 서벽으로 보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후백제 궁성의 서벽으로 추정되는 전주정보영상진흥원 토축(土築)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만약 전주정보영상진흥원 토축이 서벽으로 밝혀질 경우 후백제 왕궁 터에 대한 실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또 이번 성과를 토대로 향후 10년에 걸쳐 후백제 도성, 유적과 유물, 대외관계 등 다방면의 조사·연구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박물관 측은 “이번 조사가 도시화로 파괴되는 후백제 유적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주 우성해오름아파트 뒤편 구릉 등 도성 후백제 왕궁 터를 보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후백제 도성 발굴 조사를 포함한 종합적인 유물·유적 연구가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