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개인소유 가정집으로 사용되다 방치 돼 붕괴 위기를 맞고 있던 김제 원평 집강소 건물이 복원 되게 돼 동학혁명 산실로 되살아 나게 됐다.
김제시에 따르면 문화재청이 집강소 건물과 부지를 긴급 매입하여 복원한 후 김제시에 위탁·관리를 맡기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4일 밝혔다.
김제 원평 집강소는 원평 학원마을에 살던 백정출신 등록개라는 사람이 김덕명 금구 대접주를 찾아와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헌납한 건물로, 그후 집강소로 사용되며 폐정개혁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주민자치 행정기구로 전해진다.
김제 원평지역은 동학농민혁명운동에 있어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지역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전조가 되는 사건이었던 ‘원평취회’가 일어났던 곳이다.
또한 전봉준이 수 천명의 동학교도를 거느리며 전라우도를 호령했던 집강소가 있었던 곳으로,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한 동학농민군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구미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김제시는 이에따라 그동안 김제동학학술연구용역 및 김제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조례제정, 원평 집강소 긴급매입 및 구미란전적지 긴급발굴, 등록문화재 신청 등을 추진함과 동시 문화재청을 상대로 유적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김제시 관계자는 “문화재청의 심의결과 원평 집강소의 긴급매입 및 복원이 최종 결정됨에 따라 앞으로 문화재청 및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과 긴밀한 상호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역사적 고증에 따른 복원방향 설정 및 향후 집강소의 취지에 부합하는 민·관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 시킬 계획이다”고 말했다.
원평취회=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외세에 반대하고 탐관오리를 축출하기 위해 동학 남접(南接)의 주도하에 진행된 집회로, 동학농민군 원평취회의 주동 인물들이 기존의 동학 지도부와 완전히 다른 노선과 목표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원평취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이후에도 선도적인 투쟁성을 보였으며, 이듬해 동학 농민의 봉기를 혁명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동학농민군 원평취회는 이전까지의 교조 신원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정치적 집회였으며, 1894년에 벌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의 전조가 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