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김병로)을 전북에 가두지 말라

▲ 객원논설위원

“전북인물은 춘향과 전봉준 밖에 없다. 큰일이다.”

 

지난 9월 29일 전북대 진수당에서 열린 ‘2014 가인(街人) 김병로선생 기념 심포지엄’에서 회고 강연을 가진 김진배씨(전 국회의원·현대사연구가)가 던진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을 높이 든 전봉준이야 당연히 전북이 낳은 전국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춘향은? 오죽 인물이 없으면 소설(판소리) 속의 인물을 내세웠을 것인가. 우스개였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이러한 서두는 아마 이날 발제의 주인공인 가인(1887∼1964)선생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사전장치였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주의 파수꾼

 

가인이 누구인가. 흔히 ‘전북 출신의 초대 대법원장’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8월 실시한 전북도민 여론조사에서 인지율은 29.9%에 그쳤다. 이 중 20대의 인지도는 8.9%에 불과했다. 따라서 부연설명을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가인은 빛나는 독립운동가였다. 이미 10대 때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했고, 1921년 대동단사건을 필두로 20여 년간 100여 건의 항일사건을 변론한 항일민족변호사였다. 또한 가인은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사회운동에도 앞장섰다. 더불어 가인은 법률가로서 독보적 존재였다. 법률이론에 해박한 가인은 낮에는 경성전수학교(서울법대 전신)의 유일한 조선인 교수로서, 밤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 법대 전신)의 강사로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열정과 탁월한 실력은 해방 후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형법 민법 등 기본5법의 편찬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조문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어, 대한민국 국민 모두 그의 덕을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미군정기 사법부장으로서,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이 나라 사법의 틀과 뼈대를 세운 것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나아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사법권 독립을 지켜내고, 퇴직 후에는 민주주의의 파수꾼으로서 야권 단일화에 힘쓰다 쓰러졌다.

 

그런 그의 업적에 비해 기념사업과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2011년 고향인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 ‘대법원 가인연수관’이 세워졌고 전주 덕진공원에 법조3성(김병로 최대교 김홍섭)의 조각상이 세워졌을 뿐이다. 또 대법원 정문에 들어서면 가인의 반신상이 반기고, 가인이 일제말 머물렀던 서울 창동 근처에 가인초등학교가 있다. 올 1월에는 대법원에서 가인의 서세(逝世) 50주년을 맞아 추념식과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늦게나마 전북변호사회를 중심으로 법조타운이 들어서는 만성동에 가인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전북변호사회가 지역사회에 대한 공적 역할이 너무 미미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전북변호사회는 큰 인물을 내세워 기념관 건립의 명분을 얻고 변호사회관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지원을 받아 해결할 수 있다. 나아가 변호사회의 존재감도 내보이고 지역민과 소통을 할 수 있어 1석3조인 셈이다.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 폭 확대해야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는 가인을 전북에 가두지 말았으면 한다. 역설적이지만 가인을 더욱 크게 현창하기 위해서다. 이날 발제를 맡은 서울대 한인섭 교수의 말처럼 자칫 골목대장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추진위원의 폭을 전북에 국한시키지 말고 대폭 넓혀야 한다. 당시 같이 활약했던 대구 출신의 이인 초대 법무장관과 함북출신의 허헌 김일성대학 총장 겸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도 함께 조명해야 한다.

 

둘째는 가인을 법조의 영역에 가두지 말았으면 한다. 가인은 청렴의 상징이다. 청빈과 강직, 의연한 자세는 법조를 넘어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공직자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덕목이다. 청렴과 원칙이 공직자는 물론 모든 국민의 생활 속에 스며들도록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가인기념관 건립이 성공적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