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사·민족사·생활사 중심의 한국사 기술에 열정을 쏟아온 역사학자 이이화 씨(77)에게‘동학농민혁명’은 어제의 역사가 아니다. 그는‘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전봉준 장군처럼 키가 작고, 목소리가 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기질과 비슷해서다. 여기에 30대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 활동을 바탕으로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설로‘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이 분야 연구와 현장을 줄기차게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이이화 씨가 다시 <전봉준, 혁명의 기록> 을 냈다(생각정원). 동학농민혁명의 대중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혁명의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려는 의지가 담긴 저술이다. 오래 전 낸 <녹두장군> 이 전봉준 장군의 전기 중심이라면, 이 책은 전봉준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과 혁명의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평전’에 가깝다. 녹두장군> 전봉준,>
“한 인간의 삶을 재조명하기에 문자로 남은 단편 기록은 자료로서 불충분했고, 구전되는 기록은 사실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웠다. 특히 민간에 전해지는 기록의 경우 ‘영웅’을 바랐던 민중의 바람이 개입돼 내용이 미화되기 일쑤였고,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조선 지배세력은 전봉준의 좋은 주장도 나쁘게, 바른 행동도 그르게 그렸을 뿐 아니라 아예 배제하곤 했다. 이런 탓에 전봉준의 삶을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나름의 해석을 내려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여러 이설이 나오게 됐다. ”
저자는 오직 진실만을 추적하기 위해 의심하고 고증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의 기억이 스민 현장을 수십 차례 답사하고 현지인을 증언을 수집하면서 얻은 진실부터 조선 관료들의 기록, 후대 연구자들의 평가와 일본의 기록물들을 세심히 살폈다. 특히 당시 일본 사람들이 밀정 노릇을 하면서 쓴 목격담과 신문 기사도 활용했다.
이를 통해 가난에 내몰려 떠돌이생활을 하며 민중의 삶을 목격했던 성장기부터 역적으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지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정의와 평등, 자유를 위해 저항한 인간 전봉준을 되살려냈다.
저자는 전봉준을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세 가지 시선으로 나눠 정리했다. 민중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을 개혁할 희망이었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에게는 ‘역적’이었으며, 일본에는 조선 침략의 ‘도구’로 이용 가치가 높았다.
그는 특히 전봉준 장군을 휴머니스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양반과 상민, 상전과 노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했고, 혁명과정에서 관리나 부자들을 윽박지르거나 칼을 내리치는 대신 설득과 타이름으로 관철시킨 점 등을 그 예로 들었다. 또 일본의 회유를 뿌리치고 꿋꿋하게 죽음을 택한 지도자의 마지막도 높이 평가했다.
‘암울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신념),‘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다’(봉기),‘지금 일어서라, 더 늦기 전에’(저항), ‘녹두꽃 피다’(개혁), ‘방관자들아, 이 외침을 들어라’(전투),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최후) 등의 소제목을 달고 사건 전개 순으로 전봉준의 삶과 활동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날 조국이 분단되어 갈등이 일어나고 강대국의 간섭이 사라지지 않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의 모순은 근본적으로 청산되지 않고 있다. 또 탐욕적 자본주의가 만연해 이권을 독점하고 빈부 격차가 벌어졌다. 새로운 불평등사회가 빚어지고 있다”
저자가 전봉준을 기억하고 다시 불러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