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 또는 춘향을 관아 감옥에 가뒀고, 일제는 한국의 춘향문화를 광한루에 가뒀다.”
춘향 문화의 산실로 유명한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가 일제강점기 때 감옥과 재판소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남원에서 태어나 50년을 넘게 거주한 상당수 시민들 조차 이 물음에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광한루원 안에 자리한 광한루 앞에도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김정문 명창의 광한루 감옥 기록부(아편에 손을 댄 죄명으로 1926년 남원 권번에서 체포돼 1개월15일 수형생활)와 광한루 누각 기둥의 빗장구멍이 현재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여진다.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소장 김용근)는 한국민들의 정절과 충절의 상징인 광한루의 기상을 없애려는 일제 문화말살정책와 연결되는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김용근 소장은 “남원시민들도 일제시대 때 광한루가 감옥과 재판소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라며 “그 이유는 당시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광한루를 감옥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해 오랫동안 존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이어 “아편에 손을 댄 우리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갑작스럽게 아편중독자를 체포해 투옥시켜 전통예술의 기능을 말살하려 했던 것”이라며 “5∼6년 가량 광한루에 감옥과 재판소가 설치된 것은 정절을 상징하는 춘향문화가 국가에 대한 충절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로 해석된다”고 덧붙였다.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는 춘향문화의 산실인 광한루에 일제강점기 역사적 교훈까지 곁들여 관광자원의 확장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한편 광한루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됐을 때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됐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