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족의 일상을 누군가는 귀농의 삶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참살이라고 한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귀농이고, 육체와 정신의 건강한 조화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전한 참살이다.
책과 매체에 기고한 글을 통해 김광화 장영란씨 부부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여러해 전이다. 부부가 따로, 혹은 같이 써낸 여러 권 책들은 대부분 딸과 아들까지 네 식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기록한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이다.
도시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이 가족의 삶은 특별했다. ‘자급자족’의 삶을 추구하는 가치와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응의 태도가 놀라웠고, 부부의 사랑과 아이들의 교육 방식이 감동적이었다.
무주에 들어온 지 16년. 함께 농사일을 하며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깨우치는 삶을 실천하는 이 가족의 일상을 만나보고 싶었다.
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휴대전화 문자로 답이 왔다. ‘무슨 도움이 될는지요.’ 거절의 의미가 강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는 이뤄졌다.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 즐거웠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김광화(57) 장영란(55)씨 부부를 만났다. 스물 네 시간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하는 부부의 삶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뢰와 사랑이 깊고, 그만큼 풍요로웠다.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했으나 굴곡진 노정을 거쳐 이제는 자연이 주는 가치에 함께 눈뜨게 된 덕분일 것이다.
부부의 ‘자급자족’ 이야기 역시 흥미로웠다. 우리도 자급자족의 삶을 공유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욕심내지 않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진 않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직장생활 하다가 은퇴하는 사람들만 해도 60평생 돈을 벌어서 소비하는 삶을 살아오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삶의 바탕은 생산이 먼저여야해요. 그 바탕에 삶을 내려놓으면 자급자족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 역시 그렇다. 이 부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마음 따뜻하게 해주는 풍경이다.
-앞 산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겨울 준비는 다하셨나요.
“어제까지 좀 바빴어요. 이제 콩타작이 남았고, 소소하게 손질하지 못한 것들이 있죠. 농촌일이라는 것이 언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곧 김장하고 메주도 끓이고 땔감도 하고 일이 많습니다.”
-달력이 특별한데 직접 만드십니까.
“말일이 가까워지면 다음 달 달력을 만들어요. 저것은 생강꽃을 그린 것인데,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이 없으니 원근감도 없고…. 그래도 즐거워요. 달력이 안 붙어 있으면 생활이 답답해지거든요.”
-지난해 개정판으로 낸 ‘자연달력 제철밥상’도 이 달력 만들기로 시작되었겠군요.
“자연에서 배운 것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펴낸 책이죠.”
-무주 오시기 전에 산청에서 교육공동체 생활을 하며 간디학교를 함께 만들었는데 왜 떠나셨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공동체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나 이해 없이 시작했었던 것 같아요. 삶의 가치나 추구하는 지점이 같지만 함께 생활하는데는 불편함이 많았었거든요. 2년 정도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우리가 향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다 나누었어요. 공동체 안에서는 많은 가치들이 충돌하게 됩니다. 가치의 빅뱅이랄까. 폭발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이 팽창하는데, 그런 가치들을 인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하면 부담이 따르죠. 그 과정에서 자칫 ‘너는 공동체성이 부족해’라거나 ‘소양이 부족’하다며 개인을 공격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되거든요. 그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접근방식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삶의 바람직한 목표를 위해 좀 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선택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부부공동체라고 하셨는데 부부공동체는 성공하셨습니까.
“아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농사를 지어보면 다 된 것 같아도 마지막 거두기를 잘못하면 망하잖아요. ‘완성’이란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한데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죠.”
-어느 글에선가 보니 김 선생님은 ‘부부연애 전도사’를 자처하셨던데요.
“아직 전도를 적게 해서인지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요.(웃음) 저는 진정한 연애는 부부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과장하기 마련인데, 부부로 살아가면서는 단점은 받아들이고 장점은 서로 북돋아주고 그런 형태로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아내에 대해 그런 마음이 커지고 그렇다보니 다시 연애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부부공동체만 잘되면 우리 일상은 훨씬 행복해질 겁니다.”
-서울을 떠나 내려오셨을 때는 어땠습니까.
“막막했죠. 제가 시골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남편이 큰 병에 걸렸거나 큰일이 있는 것이라고들 했어요. ‘귀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을 때니까요. 도시를 떠날 때는 새로운 탈출구가 절실해서 선택한 것인데, 너무 막막하니까 아무 생각도 안들더군요. 지금 돌아보면 애들이 있으니 씩씩한 것처럼 행동했지 않았나 싶어요.”
-무주로 오실 때는 더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막막함이란 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학습한 두려움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사회가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 두려움이잖아요.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시골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되었죠. 그 전에는 몰랐는데 이곳에 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니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아이들에게 그 두려움을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나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아이들의 선택이었어요. 이곳에 왔을 때 작은 아이는 어려서 학교 갈 나이가 아니었고 큰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녔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더군요.”
-모든 일상을 가족들이 함께 하는데 문제는 없었나요.
“많았죠. 스물 네 시간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일정을 공유하는데 갈등이 없을 수 없죠. 부부싸움도 여기 들어온 후로 훨씬 많이 했고요. 아이들도 엄마 아빠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영향 받았죠. 도망갈 때가 없잖아요. 학교에 다닌다면 그 시간만큼은 떨어져 있게 되지만 부부싸움 한 엄마 아빠와 같이 지내야 하니까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통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죠. 그래서 소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운영하는 블로그가 많이 알려졌더군요. 자연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도시 사람들에게도 나누는 행복이 클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곡식꽃 이야기가 많던데요.
“여러해 전부터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곡식꽃을 주목하게 되었어요. 단순한 흥미나 관심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된 곡식꽃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벼가 꽃이 피는지 콩이 꽃을 피우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잖아요. 언제부터인가 곡식꽃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다 보니 많은 세계가 거기 있더군요. 곡식꽃만해도 종류가 많아 추위를 타는 꽃도 있고, 웬만한 추위에도 끄떡없는 꽃이 있죠. 그 다양한 세상에 감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먹는 곡식은 이런 작물들이 연애하고 사랑한 결실이에요. 농작물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를 들여다보면서 배우고 깨우친 것들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작물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과정들이 인생과도 같다는 말씀이군요.
“옥수수 한 알 쌀 한 톨이지만 그 생물학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서로 사랑해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숭고하고 뜨겁습니다. 우리 삶도 그런 식물의 세계를 배우고 닮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거든요.”
-듣기만 해도 흥미롭습니다. 곡식마다 또 특성이 다르겠지요.
“그런 관점으로 보면 더 그렇지요. 옥수수는 옥수수대로, 당근은 당근대로 밤나무는 밤나무대로 독특한 특성이 있어요. 옥수수만 해도 한 알을 만드는 과정이 참으로 치열하거든요. 옥수수는 우리가 수염이라고 부르는 그 부분이 암술입니다. 옥수수 암술은 다른 작물보다 긴편인데 움직임이 아주 독특하죠. 수정할때 보면 아래로 처지지 않고 중력을 이겨내면서 옆으로, 때로는 위쪽을 향해 바로 섭니다. 자기 주위에 날아드는 꽃가루를 가능하면 더 잘받기 위한 암술의 노력이에요. 옥수수 꽃가루는 바람이 없어도 2미터 정도 나는데, 바람을 타면 몇 백미터까지 날아가 수정을 하죠.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을 보면 어떤 숭고함까지도 느껴져요. 옥수수를 먹다보면 알이 꽉 차지 않고 비어있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것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정이 안된겁니다. 그럴 때는 되게 마음이 짠해요.(웃음)”
-모든 곡식들이 꽃을 피우나요.
“거의 그렇죠. 씨앗을 거두다 보면 씨앗 하나가 얼마나 많은 꽃을 피우는지 궁금해집니다. 마늘은 여섯 쪽으로 나오고, 우리가 키우는 작물 중 가장 많은 꽃을 피우는 것은 당근이더라고요. 당근은 십만 개 내외의 꽃을 피웁니다. 당근 씨앗 하나에서 그렇게 많은 꽃을 피우니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그래서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손을 많이 남기려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당근을 좋아하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가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 주위를 둘러보니 당근을 좋아하는 지인이 아이를 넷이나 두었더라고요. 가설에 힘이 실리는….(웃음)”
-요즈음에는 어떤 작물이나 개량종이 많이 나오지 않나요.
“물론이죠. 우리는 토종 작물을 키우는데 수정이 안 되어도 열매를 갖는 개량종이 많습니다. 오이도 그중 하나죠. 그래서 무정오이가 많습니다. 토종 오이는 지나면 노각이 되거든요. 개량종은 길이는 길어지는데 안에 씨앗이 아주 부실합니다. 토종은 통통하죠. 자기 몸 안에 씨앗을 품기 위한 스스로의 변화예요. 자기 안에 씨앗을 맺는 오이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런 오이를 유정오이라고 부릅니다. 씨앗도 없고 부실한 오이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
-곡식꽃에서 특별한 행복을 얻은 것 같습니다.
“작물과 마주하면서 공감하고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기쁨이 크죠.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예요. 곡식꽃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옮기는 작업도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이 즐거움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골에도 곡식꽃이 예전보다 많이 없어진 것 아닌가요.
“그럴 겁니다. 꽃을 다 좋아하지만 정작 우리를 먹여 살리는 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만드는 벼꽃이나 콩꽃, 김치를 만드는 배추꽃 무꽃도 그렇죠. 시골에서도 이런 꽃들에 별 관심이 없어요. 왜냐면 꽃을 피워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열매를 거두는 작물은 꽃을 피우지만 무나 배추도 지금은 다 씨앗을 사서 심잖아요. 배추나 무꽃은 늦여름에 심어 겨울을 나면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우죠. 그런데 가을에 배추 무를 뽑고 나면 밭을 다 갈아엎잖아요. 모든 작물농사가 이런 식으로 되다보니 농촌에서도 꽃이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죠. 이런 순환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먹는 것이 자연에서 왔다는 것조차 잊게 되겠죠. 그것이 안타까워서 곡식꽃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꽃들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군요. 도시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몇 군데 매체에 연재하고 있고, 강의도 하는데, 젊은 층들의 호응이 기대이상으로 좋습니다. 강의를 부탁해도 꼭 곡식꽃 이야기를 끼워서 하거든요. 보통 꽃은 피었을 때만 사랑받고 피고나면 그냥 쓰레기인데, 곡식꽃은 지고나면 더 예쁩니다. 앞에 열매를 달고 뒤의 꽃은 시들어 가는데 그것이 참 예뻐요.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영감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지고 나서도 예쁜 것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을 보는 시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 생활이 풍요로워지긴 했는데 삶의 근원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은 많이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가치 있는 것들을 외부에 의존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찾아내는 일상의 즐거움이 소중하죠.”
부부에게 곡식꽃은 새로운 기쁨을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여러 해째 남편은 사진으로 곡식꽃을 담고 아내는 글로 꽃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해나가는 이 작업의 결실은 우리들에게 또다시 좋은 선물로 안겨질 것이다. 그 결실이 기다려진다.
● 김광화·장영란 부부는 대안학교 교육공동체 생활…건강한 먹을거리 관련 책 여러권
경상도 출신인 김광화씨와 서울 토박이인 장영란씨는 1998년 두 아이를 데리고 무주로 들어왔다. 교사였던 남편과 국문학을 전공한 아내 모두 삽십대 후반, 세상살이가 더 진지해지는 즈음이었다. 부부는 그보다 2년 앞서 남편의 제안으로 서울을 떠나 경남 산청에서 대안학교(간디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교육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동체 삶에 한계가 왔다. 스스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주로 올 때는 산청으로 떠났을 때보다도 앞날이 더 막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무모했던 선택 덕분에 삶이 새로워졌다. 초등학생인 딸과 여섯 살 터울인 아들은 시골 생활에 부부보다도 더 잘 적응했다. 무주는 부부보다 앞서 자리 잡은 허병섭 목사와 인연이 닿았던 덕분에 얻은 삶의 새로운 터였다. 논을 구하고 농사를 시작했다. 이웃들은 젊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했다.
처음에는 벼농사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체득한 농사일과 풍경이 스승이 됐다. 중학교 1학년이던 딸이 봄소풍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네 가족이 스물 네 시간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삶이 시작됐다. 나쁘진 않았으나 도시에 있을 때보다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엄마 아빠의 갈등은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갈등이 심화되면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로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 환경에서 아이들과 대화는 부부싸움에서 벗어나게 한 큰 힘이었다. 가족들이 서로의 무의식 세계까지 알게 되는 환경.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소통하기 위해 노력 했다. 아이들이, 아빠가, 아내가, 엄마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더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됐다.
처음에는 벼농사에만 집중하다가 식구들이 먹는 먹을거리를 스스로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자급자족하는 일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해낼 수 있게 됐다.
딸은 3년 전에 서울로 갔다. 역시 청년공동체에서 잘 지내고 있지만 가정을 이루면 시골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누나가 살던 아래채를 물려받은 아들은 밥을 같이 먹고 일은 같이 하지만 철저하게 독립된 생활을 한다.
부부는 7-8년 전부터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곡식꽃을 공부하며 사계절 꽃의 변화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담고 있다.
건강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가족은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글쓰기의 일상이 가져온 빛나는 결실이다. 〈자연달력 제철밥상〉 〈숨 쉬는 양념 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 먹어라〉 〈열두 달 토끼밥상〉 〈피어라 남자〉 등 인데, 이 중 부부가 펴낸 책 <아이들은 자연이다>는 꾸준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스스로 절판했고, 〈자연달력 제철밥상〉은 지난해 내용을 보완해 개정판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