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미술관

“나는 그림과 조각품으로 조국을 배웠습니다.”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이 인터뷰에서 들려준 말이다. 메세나 운동의 선구자인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재일교포 2세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일본의 타자와 호수 옆에 ‘기도의 미술관’ 건립을 추진했다. 어린 시절, 화가가 꿈이었으나 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그는 사업이 번창해 생활이 안정되자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수집 대상은 온전히 재일작가의 작품이었다. 자신처럼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거나 창작을 접어야하는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싶었다. 그 뒤로 한일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왔던 재일작가들의 작품은 ‘하정웅 컬렉션’ 중심이 됐다. 재일교포들의 한과 고통, 좌절과 죽음,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는 기도와 진혼의 의미를 담은 작품들이었다. 작품이 쌓여가면서 미술관 건립의 의지가 강해졌다.

 

그가 살았던 아키타는 수력발전소와 광산이 있어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특히 수력발전소 공사에 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들은 엄청난 노동력에 시달려야 했다. 아키타는 눈이 많고 추운 지역인데다 먹을 것이 부족해 영양실조와 추위를 견디지 못해 도망치다 붙잡혀 비명횡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명절이면 가뜩이나 부족한 음식을 나눠주며 마을 뒷산에 있는 무덤에 다녀오게 했다. 무덤이라고 해봤자 돌 하나 놓인 것이 전부였지만 그곳에 음식을 놓고 절을 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조선인 노동자들의 무덤이란 것을 그때 알았다.

 

미술관을 타자와 호수 옆에 건립하려고 했던 것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어서였다. 호수 근처에는 히메관음상이 있었다. 수력발전소 건립으로 환경이 변화하자 죽은 물고기와 호수신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하 이사장은 이 위령비가 강제징용 돼 이곳에서 일하다가 숨진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술관 건립은 잘 진행되는 듯 했다. 땅도 사고 설계까지 마쳤으며 일본인들의 호응도 높았다. 그런데 그즈음 이루어진 한일회담에서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가 부상했다.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단박에 바뀌었다. ‘기도의 미술관’ 건립은 무산됐다. 이후 하 이사장은 한국과 일본의 공공미술관에 수집한 작품을 기증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미술관’은 실체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와 일본 여러 곳의 미술관이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