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전서(栗谷全書)에 나오는 말이다. 여항은 시정(市井)을 뜻한다.
붕쟁이 싹 텄던 선조 때는 훈구파와 척신, 사림 등 오늘날로 치면 여와 야, 당내 계파간 정쟁이 치열했던 시기다. 공론이 실종되고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판쳤다. 율곡전서에 나오는 이 말도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공적 영역이 제 기능을 못하고 사사화(私事化)되는 현실을 우려하는 지식인의 고뇌이다.
최근 정국의 뇌관으로 부상한 ‘정윤회 문건’ 파문도 비선(秘線)에 의한 국정농단이 핵심이다. 현 정부 실세로 꼽히는 정씨와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 총무, 정호성 1부속, 안봉근 2부속비서관)이 작년 10월부터 매월 두차례 만나 청와대와 정부동향을 논의하고,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 등 청와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것이 문건의 내용이다.
이해 당사자들은 ‘증권가 찌라시 수준’(청와대) ‘사실이라면 감방 가겠다’(정윤회)고 단도리쳤지만 문건이 청와대에서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으니 각종 의혹과 추측이 일파만파로 번지는 건 당연지사다.
우리나라는 혈연, 지연, 학연 등 전통적 연고주의의 특징이 강한 사회이다. 선거가 만연한 요즘에는 이런 전통적 연고보다 ‘캠프 연고주의’가 더 강하게 유지되는 끈이다. 정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과 비서실장을 지냈고 세 비서관은 정씨가 추천해 기용됐다고 한다. 몇차례 선거도 치렀다. 이들 역시 ‘박근혜 캠프’ 연고라는 속성을 띤다.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선거캠프 출신들이 도정과 시·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하다. 특히 인사 영향력이 강하다.
국가와 자치단체는 물론이고 어느 조직이든 공론을 통하지 않고 사적인 네트워크에 의지한다면 망하게 돼 있다. 조직은 형해화되고 의사결정은 사사화됨으로써 구성원들로부터 외면 받기 때문이다. 율곡의 지적처럼 공조직을 통한 공론장의 기능이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정씨 문건 파문도 파문이지만, 선거캠프 출신에 의존하는 단체장들이 새겨야 할 일이다.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