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가장 큰 역모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역모 죄로 희생당한 사건이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 불리는 정여립 사건이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어난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흔적이 진안 죽도와 천반산에 남아 있다.
그 곳을 찾아 진안의 물곡리에서 좌회전하여 ‘자연발생유원지 가막천’이라고 쓰여진 팻말을 지나 가막골재를 넘는다.
조선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드리운 곳에 자리 잡은 진안읍 가막리 노인정을 지나 아랫 가막리로 내려가면, 북서쪽으로 홍두깨날처럼 길게 뻗은 산등성이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 천반산 쪽으로 향하면 정월 초사흘 날에 당산제를 지냈다는 당산터가 남아 있지만 당산은 허물어지고 우거진 느티나무 숲만 무성하다. 길은 묵치, 또는 먹재라는 재 넘어가는 길로 뻗어있다. 한 시절 중석광산이 있어서 호황을 누렸다고 하지만 지금은 폐광으로 길은 그저 임도처럼 어설프고 천반산 산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초입은 희미하지만 올라갈수록 산길은 뚜렷하다.
능선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좌측으로 난 능선 길을 십 여분 걸었을까, 십여 명은 너끈이 앉을 마당처럼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그 바위에서면 멀리 북쪽으로 덕유산, 남덕유산, 그리고 육십령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눈금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장안산, 덕태산 지나 마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 금남정맥이 눈 안에 가득 찬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리면 구봉 송익필의 자를 운장산 자락 지나 구봉의 연봉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이름붙 은 산, 천반산 아래에서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려온 금강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량천이, 파(巴)자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중간 지점에서 몸을 합하여 금강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 합수머리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딴 데로 돌려졌다가 다시 본래의 물길을 되찾았다.
이곳 천반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에는 천반(天盤), 지반(地盤), 인반(人盤)의 명당(明堂) 자리가 있는데 이 산은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하여 천반산으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신기마을에 사는 김진대씨의 말에 의하면 그가 이곳에 이사를 왔던 이십여 년 전만 해도 5000여 평은 될 듯 싶은 평지가 펼쳐진 이곳에 세가구쯤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잡목만 무성하고 군데군데 돌보는 사람 없는 듯 싶은 무덤이 남아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다시 길을 나와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동향 쪽에서 내려온 물길은 그 맑은 물속을 속속들이 보여주며 흐르고 있다. 떨어진 낙엽들이 비단처럼 깔린 길로 15분쯤 따라가면 뜀바위에 닿는다. 가을 천반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곳에 와서 보면 알 것이다. 붓끝으로 한점 획을 그은 것처럼 강물은 이어지고 활활 타오르는 단풍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답다.
이 천반산에 정여립 장군이 서있고, 부귀산에는 관군이 서 있어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와 함께 송판서 굴에서 정여립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약 15미터쯤 되는 이 바위와 20미터 거리로 마주보고 있는 뜀 바위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정여립 장군이 훌쩍훌쩍 뛰어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산과 산이 겹겹이 포개진 곳에 감싸여 있는 천반산과 죽도의 모습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다시 연평리 쪽으로 몸을 돌리면 금강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이곳에서 30미터쯤 바위 사이로 비탈진 길을 내려가면 천반산의 명물 송판서굴이 나타난다. 바위굴 2개가 15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서북쪽을 향하여 쌍굴을 형성하고 있는 이 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로서 큰 굴의 길이가 7미터쯤 되고 작은굴은 5미터쯤 되며 1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쉴 만한 넓이다. 이 굴의 중간쯤의 바위틈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약수라고 전해지는 한 줄기 물길이 있다.
이 굴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인 송 판서는 호는 보신이며 아호는 퇴휴제로서 연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438년(세종 20)에 도승지에 올랐고 1449년에 예조판서에 올랐는데, 그는 1456년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처가인 장수군 계남면 방아재로 낙향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먼저 낙향한 김남택과 한 마을에 살면서 낙산낙수를 즐기며 도학과 제자백가를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484년에 죽었다. 이 굴은 낙향한 송 판서가 은둔할 곳을 찾던 중에 도인의 안내를 받아 이 굴을 발견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는 곳이다.
그 뒤 이 굴은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이 대동계원들을 거느리고 병마를 훈련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나는 죽도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천반산의 능선에 앉아 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진안군 통계연보에 따르면 28년 전 이 천반산 아래 죽도 근처에서 정여립과 그의 일파가 쓰던 것으로 보이는 솥과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름이 6미터쯤 되는 거대한 돌솥이었는데, 솥이 어찌나 크든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고 하며, 화살 촉 한 개로 낫을 다섯 개나 만들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발굴된 돌솥은 어쩌다가 물속으로 다시 묻혀버리고 말았고, 당시 돌솥을 실제로 보았다는 노인네들은 언젠가 그 돌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여립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전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절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 죽도에 건물을 지어놓고 훈련 시에 그 무기를 썼었다는 그것 역시 불운했던 혁명가 정여립에 대해 품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이 만들어낸 신화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정여립이 썼던 무기를 주었다 거니 그 당시 기왓장이 발견되었다느니 하는 안쓰러운 이야기를 흘린 것은 아닐까?
나는 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반란을 꾀했거나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사람들의 말로를. 그들뿐인가. 그들의 주변 사람들, 가족, 선조들까지도 3대가 멸족당하고 모든 행적들이 부정적으로 각색되었으며, 얼마나 처참하게 잊혀지고 사라져버렸던가를….
나는 죽도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천반산의 능선에 앉아 기축년의 그 가슴 아픈 역사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1589년 10월 2일(선조 2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반을 꾀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비밀장계는 원래 임금만 개봉할 수 있었다. 당시 조정은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영의정 유성룡,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 세 정승도 동인이었으며 정여립 역시 동인에 속해 있었다. 그날 밤 선조는 중신회의를 열어 내용을 알렸는데 역모의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았다.
“기축년 겨울 서남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얼어붙은 강진(江津)을 건너 서울로 직범하여 무를 불사르고 강창을 탈략하여 심복을 도내에 배치하고 자객을 분송하여 먼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죽이고 거짓 교지를 꾸며서 방백과 병사, 수사를 죽이며 대간을 가만히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일어난다.”
그러나 황해감사의 장계는 박충간의 보고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뿐, 어떠한 경위로 첩보를 취득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이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전라도와 황해도로 급파되었다. 그때 동인들은 정여립이 서울로 붙잡혀오면 그의 능숙한 능변으로 그간의 경위를 해명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동인 측의 기대와는 달리 10월 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의외의 급보가 올라왔다. 정여립이 하루 전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한양이 술렁거렸다.
정여립은 그때 황해도 안악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변숭복으로부터 고변사실을 전해듣고 변숭복과 아들 옥남, 그리고 동지였던 박연령의 아들 춘룡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숨어들었다고 기록되었다. 정여립 일행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안의 죽도 천반산 속에 숨어 지내면서 며칠을 그 인근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진안현에 알렸고, 진안현감 민인백이 이끄는 관군이 산을 포위했다. 민인백은 바위 속에 숨어있는 정여립 일행을 반견하고 왕명을 전하고서 사로잡으려 했다. 그때 정여립이 변숭복을 먼저 칼로 치고, 그의 아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쳤다. 그리고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꽃아 놓고 목을 칼날에 대어 자결했다. 죽으면서 정여립은 황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정여립 사건의 전말이다. 혁명가이며 사상가였던 정여립이 낙향하여 금구일대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조직했고 이 죽도를 오고가며 힘을 키우던 중 그 대동계가 세를 불리기 전에 서인 정철과 송익필에 의해 싹둑 잘린 것이다.
그 사건의 여파로 조선의 지식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그 뒤로 전라도 선비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그 영향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호남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록은 아래와 같다.
“사마공(司馬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위(魏)나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 수 없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요(堯)·순(舜)·우(禹)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다고 한 것은 왕촉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聖賢)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薺)나라, 양(梁그)나라의 임금에게 천자(天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의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를 풀어서 말하면 ‘위나라의 조조가 정통이지, 촉나라의 유비는 틀린 것이며, 따라서 유비를 정통이라고 주장한 주자를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율곡 이이가 “호남 제일의 인물”이라고 평했던 정여립은 호남지역의 역사 속에서도 깡그리 지워지고 말았다.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정여립은 그렇듯 사라지고 그래서 조선 역사상 복권되지 않은 사람은 그와 허균뿐인 것을….
하지만 그의 행적들은 입에서 입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요 근래 들어야 몇 권의 책들이 나오고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그날의 정여립도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새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강물은 무심히 흘러갔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 보았을 그 강물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흐르고 있건만.
나는 다시 이 죽도에 오리라. 그리고 그날 그들이 이곳에 뿌린 눈물 젖은 핏자국들을 찾아보리라. 어느새 죽도에도 어둠이 내리고 어둠내린 물 건너 산자락에 자막처럼 시인 고은의의 <만인보(萬人譜)> 중 시 한편이 흐르고 있었다. 만인보(萬人譜)>
“일자 한 자 늘어놓겠습니다. 무식이 배짱입니다.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귀천 상하 계급 노선입니다.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 평등 노선입니다. 바로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 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앞장 선 천하평등 노선을 강화합니다./ 주자는 다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고,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파 은사, 그리고 선배따위 닥치는 대로 평가합니다. 그는 동인계입니다. 정철과 대결하다가, 그 놈의 늪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해 버립니다.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어허 위태한지고,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될 말인가, 어디 그 뿐인가,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인의가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중략)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 전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한데, 이 민족자결주의 세력 늘어나자,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습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鎭安) 죽도(竹島)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 줄 뿐이라고,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거리라고’한탄하는 단재의 말마따나.”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