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전북도교육청 앞. 어린이집 관계자 및 학부모 1000여명 이상이 모여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외치고 있었다.
주말이 지나고 15일이면 도교육청의 내년도 예산 심사 및 처리 기일이고, 그 때까지 수정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예고된 대로 집단 휴업이 시작될 판이었다.
“수정예산안 편성이 합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장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던 이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굴 한 쪽에는 떨떠름함이 여전했다. 비유하자면, 2대 0으로 지고 있던 축구 경기에서 후반 35분 쯤에 만회골을 하나 터뜨린 표정이랄까.
큰 산을 하나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에 본보는 누리과정 예산 논란을 되짚어보며,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보기로 했다.
△ ‘증세 없는 복지’속 책임 떠넘기기
‘누리과정’이란 만3~5세 아동들에 대한 무상보육 정책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 2012년에 만5세 아동 대상으로 처음 도입됐고, 이 해 말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가 ‘국가가 책임지는 만3~5세 무상보육’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국가적 이슈가 됐다. 이미 앞선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전국적인 이슈가 되며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도출돼 있던 시점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론은 ‘지하경제 양성화’와 ‘불요불급한 지출 축소’를 바탕으로 한다.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다. 한 국가의 정부가 추가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세수를 더 걷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으로 걸었기에 증세는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 공약을 상당부분 수정해야 했고, 무상보육의 경우에는 부담을 지방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어정쩡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방이, 특히 각 시·도교육청이 그 부담을 받을 수 있는 여력이 없다는 데에 있다.
시·도교육청의 재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법률상 ‘내국세 총액의 20.27%’로 정해져 있다.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부담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예산 증액이 필요한데, 증세는 이뤄지지 않았고, 거꾸로 경기 침체로 교부금이 줄어버렸다.
시·도교육청들은 이 때문에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을 개정해 교부율을 현행 20.27%에서 25.27%까지 올려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지방의 교육자치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정치평론가)는 “지방자치발전위원회 계획을 놓고 봐도, 자치에는 재원이 핵심인데 이 문제는 빠져 있다”면서 “교육감 직선제 폐지 수순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다. 정치적으로 얕은 수”라고 지적했다.
도교육청 역시 이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도교육청 예산과 관계자에 따르면 내년도 예산 중 재량사업에 투입될 수 있는 예산은 1300억 정도. 전체 예산의 5% 수준이다.
그간 정부는 “무상급식 중단하고 그 재원으로 무상보육 지원하라”고 주장해왔다.
한편 법률적으로도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누리과정 자체가 오랫동안 세심하게 준비된 정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하나가 다른 관계 법령의 조화를 깨뜨리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시·도교육청들은 2015년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편성 및 집행의 조건으로 관계 법령(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영유아보육법, 유아교육법, 지방재정법)의 개정을 요구해왔다.
△미봉책에 불과한 수정예산안
누리과정 예산에 관한 문제는 이미 지난 6월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지난 6월 27일 서울시교육감 인수위원회는 “누리과정 지원에 많은 재정이 투입된 반면 교부금과 전입금은 감소했기 때문에 시교육청 재정은 최소 3100억원 부족한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10월에는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가 누리과정에 대한 정부 지원을 촉구하며 어린이집 보육료 예산 편성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
합의와 번복이 반복되는 우여곡절 끝에 내년도 예산안에 ‘목적예비비’ 명목으로 5064억원이 편성돼 국회를 통과했지만, 법률 개정 문제는 여전히 깜깜하다.
바로 이 부분이, 도교육청의 수정예산안 제출이 미봉책에 불과한 이유다.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각 시·도교육청의 재정여건은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내년도 누리과정 예산 자체가 ‘국고지원분 일부+지방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비록 이자를 정부가 지원한다고는 해도, 부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년은 어찌 넘긴다고는 해도, 2016년 예산을 두고는 어떤 진통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
도교육청은 기존 지방채 발행액, 민간투자사업 채무부담액 등을 포함해 이미 5400억 규모의 빚을 지고 있으며, 내년도 지방채 발행 예정액 1957억을 포함하면 부채 규모는 7400억이 넘는다. 여기에 만약 누리과정 예산 관련으로 지방채를 추가로 발행할 경우, 부채 규모가 8000억을 돌파할 수도 있다.
또 법률상 책임소재가 법과 시행령에 따라 다르게 돼 있기 때문에, 이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지 않으면 이번에 벌어졌던 것과 같은 갈등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이번 도교육청-도의회간 합의에는 앞서 언급한 4대 관련 법령을 개정하는 데 공동대응하자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보육 대란’을 피하려면 수정예산안에 편성된 3개월 분 예산이 바닥나는 시점, 즉 4월이 될 때까지 법률 개정을 관철시켜야 한다. 3개월 분의 예산은 사실상 ‘법령 개정을 위한 시간을 버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단기적 대책 없다”…증세 필연적
백종만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단기적인 해법 같은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백 교수는 “복지가 늘어나긴 했지만, 이는 중앙이 지방의 사정을 고려하고 동의를 받아서 늘린 것이 아니다”면서 “결국 이제 기본적으로 증세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무상보육과 같은 보편적 복지 정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안정적인 재원이다.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증세가 필연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 때문에 예산 정국에서 야당은 법인세 증세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일부 비과세·감면 혜택 수정 외에는 큰 성과는 없었다.
김승연 서울복지시민연대 정책위원장(성균관대 사회복지학 초빙교수)은 지방의 복지사업 부담을 덜 수 있는 해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복지사업의 국고보조율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특히 그 성격상 국가사업에 가까운 누리과정과 같은 사업은 국가가 책임지는 비율을 늘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하나는 이와 같은 복지사업을 시행할 때, 지자체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창구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도 ‘지방재정부담심의위원회’라는 기구가 있긴 하나 심의에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들어, 김 박사는 “구속력 있는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세계적으로 복지사업이 지방으로 이양돼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선진국들은 지방의 지출이 늘어날 때 세입도 함께 늘려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었다”면서 “우리나라는 지방 세입이 중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인데도 지출은 계속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일차적으로는 정부가 지방에 복지 부담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미 떠넘긴 것도 되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해법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이와 함께 진지하게 증세를 논의하면서, 지방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누리과정 자체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미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상태고, 많은 학부모들이 혜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에 똑같은 갈등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논의가 필요하다. 이미 사회적 비용은 많이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