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훌쩍 넘긴 이념 전쟁
서양의 역사에서 마녀사냥의 어두운 기억은 후세인들에게 집단적 증오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개척시기 세일럼 마을의 마녀재판에서는 어린 소녀들의 무지와 불장난이 삽시간에 어른들 사이의 증오로 이어져서 짧고 강렬한 집단적 비극을 만들어냈다. 유부남 목사를 유혹하려던 한 소녀의 빗나간 사랑과 저주, 거짓 증언이 온 마을에 증오의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였다. 아더 밀러는 1950년대 초반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미국사회에 이 이야기를 꺼내옴으로써 통렬한 교훈을 전하려 했다. 수백 명을 투옥하고 수만 명을 조사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삽시간에 광풍을 일으킨 매카시즘은 실로 무서운 기세로 미국사회를 잠식한 사건이다. 극작가 자신은 물론 희극배우 채플린이나 음악가 번스타인 등 유명한 대중적 인기인들도 이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아더 밀러가 〈시련 crucibl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세일럼의 마녀재판 이야기에는 철없는 소녀 애비게일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빗나간 사랑과 그로 인해 겪는 모욕감을 해소할 탈출구로 온 마을을 마녀사냥의 광풍에 휩싸이게 하는 길을 택했다. 흥미롭게도 매카시즘의 창시자인 조셉 매카시 의원도 온갖 추문과 범법행위로 인해 파멸 직전에 있던 정치인이었다.
오래 전에 사라졌어야 할 매카시즘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고비 때마다 고개를 쳐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집단의식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저 냄비 투척 고등학생은 어찌 보면 그 스스로 어처구니없는 선동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은 엄히 꾸짖고 타일러서 집에 돌려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잡아가두고 처벌을 하는 것으로 저 빗나간 증오심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군가의 주장대로 오도된 ‘열사’의 길을 가도록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여전히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번져가는 우리 사회의 레드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궁리는 이 뿌리 깊은 피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생각이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이다.
레드 콤플렉스 극복 방안 고민할 때
북한에도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이미 몇 십 년 전에 다 알려진 이야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강 맥주가 맛있다는 말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은 참 무섭고도 슬픈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슬픈 생각을 떨치지 못 하는 이들의 존재도 엄연한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오래된 피해의 기억을 어떻게 새로운 상생의 기운으로 바꾸어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대로 우리가 잊은 것들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