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변산에서 내소사 가는 길】직소폭포 장쾌한 울림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세상 시름 '사르르'

폭포가 만든 빼어난 절경 / 병풍처럼 둘러싼 봉우리 / 고즈넉한 산사의 운치 / 변산의 매력에 흠뻑 젖어

▲ 실상사.

얼마 전 조선 중기 문장가이자 혁명가였던 교산(蛟山) 허균(許筠)의〈한정록(閑情錄)〉을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겨울의 초입에 변산을 넘으리라 생각했었다. 혼자도 좋고 둘이라면 더욱 좋고 그렇게 넘어가리라 생각했는데, 그때 가슴 속 깊이 들어와 떠나지 않는 글이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송나라 조사서가 말했다.

 

‘나에게는 평생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세상 모든 훌륭한 사람을 다 알고 지내는 것이요.

 

두 번째 소원은 이 세상 모든 양서를 다 읽는 일이요.

 

세 번째 소원은 이 세상 경치 좋은 산수를 다 구경하는 일입니다.’

 

이에 내가 말하였다.

 

‘다야 어찌 볼 수 있겠소. 다만 가는 곳마다 헛되이 지나쳐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무릇 산에 오르고 물에 가는 것은 도(道)의 기미를 불러 일으켜 마음을 활달하게 하니

 

이익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가 덧붙여 말했다.

 

‘산수를 보는 것 역시 책 읽는 것과 같아서 보는 사람의 취향의 고하(高下)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굳이 방안에 들어박혀서 공부를 하지 않고, 자연을 벗하는 공부, 그게 참 공부가 아닐까?

▲ 직소폭포.

● 과거 영광 상상케하는 실상사 터

 

오늘의 책은 내변산에서 내소사 가는 길에 펼쳐진 온갖 사물이다. 내변산 탐방 지원센터에서 조금 오르자 나타나는 절, 실상사(實相寺)다. 이 절은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과 대장경 등 보물급 문화재가 있었다. 그러나 6·25때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3기의 석조부도와 허튼 돌로 막 싼 기단만 남아 있는 절터는 이름 모를 뭇 새들의 울음소리 속에 붉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에 온 몸을 드러낸 저 금당 터에 내소사 대웅전이나 개암사 대웅전 같은 날아갈 듯한 절 집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내소사에 소재해 있는 연재루는 이 실상사에서 1924년에 옮겨갔다는데….

 

어디선 듯 독경소리 들리는 듯 싶고 계단을 내려설 때 뒤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소리 이 산 속에 가을이 너무 깊고 깊구나, 그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호수가 하나 만들어지고 그 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로 뒤쪽으로 길이 나있다. 잔잔한 물결 너머의 산들은 붉게 타오르고 가족 단위의 산행객들이 쉴 새 없이 오고간다.

 

한참을 올라가자 발아래에 소가 보이고 그 위에서 떨어지는 한줄기 직소폭포, 김수영의 ‘폭포’라는 시 한 편이 물소리에 실려 스치고 지나간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나는 폭포 아래로 내려가 가만히 바위 위에 걸터앉는다.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는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떨어진다. 문득 바람이 우수수 불고 그 바람결에 빗자루로 쓸어대는 것처럼 물살들이 어딘가를 향해 우르르 밀려간다.

 

옥녀봉, 선인봉, 쌍선봉 등의 봉우리들에 휩싸여 흐르고 있는 2km의 봉래구곡 속에서도 단연 빼어난 변산 팔경의 제1경이 실상 용추를 이루고 실상 요추에서 흐르는 물은 바로 아래 제2, 제3의 폭포를 이루며 흘러 분옥담, 선녀탕 등의 소를 이루며 이를 일컬어 봉래구곡이라고 부른다. 이 물이 흘러 백천내에 접어든다. 백천내에서 흐르는 물이 의상봉 아래 중계리에 닿았고 그 아래에는 중계 초등학교가 있었다.

 

직소폭포를 지나면서 길은 평탄하다. 마치 그 옛날 이곳쯤에도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을 법하다.

 

형형색색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 있고, 길 아랫자락을 흐르는 물소리는 단아하다. 어쩌다 만나는 등산객들이 서로 만났다 헤어지고 부는 바람결에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진다. 내가 떨어지는 단풍잎을 한 잎 주을 때 화담 서경덕이 내게 한마디 말을 건넨다.

 

“존재하는 만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 못하고, 다 왔는가 하면 또 온다. 오고 또 오는 것은 시작이 없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인데 그대에게 묻노니 처음에 어디서부터 오는가?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며,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계속 해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대에게 묻나니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 화담의 물음처럼 또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가? 이 나뭇잎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이 자연으로 돌아갈 날도 멀지 않을 것인데 나는 이렇듯 바쁘게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변산, 나라 재목의 보고

 

변산은 바깥에다가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으로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98㎞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 변산이라고 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 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이 섰다던 안 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변산을 다음과 같이 썼다.

 

“서쪽,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고, 산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리웠다. 곧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에 알맞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봉래구곡, 직소폭포, 선제폭포 같은 빼어난 절경이 있는 산 변산은 산이 깊고 울창하여 예로부터 약초나 버섯을 재배하거나 벌도 많이 쳤다. 특히 안 변산의 훤칠하게 자란 소나무는 곧고 단단해서 고려 때부터 궁궐을 지을 재목과 목선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

 

이규보가 쓴 글을 보자. “변산은 나라 재목의 보고이다. 소를 가릴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 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에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펴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뿌리와 옆구리의 닿는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그런 연유로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할 때에도 이 변산의 나무들로 전함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변산의 삼림 상황은 어떠한가. 충청도 안면도의 소나무 숲과 더불어 목재의 생산지로서 나라 안의 손꼽히던 변산이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하여 소나무숲은 없고 잡목만이 무성할 뿐이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곧 바로 하산 하는 길, 하나는 능가산 가인봉으로 가다가 내소사(來蘇寺) 아랫자락으로 가는 길, 나는 능가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천천히 오르는 산, 암벽 사이로 나 있는 길을 올라서자, 멀리 선운산, 소요산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전란에서 살아남은 내소사

 

능가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길을 내려가자 내소사에 이른다. 경내에는 범종각, 봉래루, 삼층탑, 설설당, 대웅보전 등의 건물들과 요사 채들이 그림처럼 서있다.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대 소래사’와 ‘소 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 소래사’라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선사가 중건하였고 1902년 관해가 중창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고려 때 빼어난 시인인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제변산 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정지상이 변산에 왔던 시절만 해도 소래사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다.

 

적막한 맑은 길에 솔뿌리가 얼기설기,

 

하늘이 고대, 두우성(斗牛星)을 숫제 만질듯,

 

뜬 구름 흐르는 물 길손이 절간에 이르렀고,

 

단풍잎 푸른 이끼에 중은 문을 닫는구나.

 

가을바람 산들 산들 지는 해에 불고

 

산달이 차츰 훤한데 맑은 잔나비 울음 들린다.

 

기특도 한지고, 긴 눈썹 저 늙은 중은

 

한 평생 인간의 시끄러움 꿈 조차 안 꾸는 구나.

 

위의 시로 보아서 중국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절을 찾아와서 군중재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내소사로 바뀌었다는 말은 그냥 전해져 오던 전설이 맞을 듯 싶다. 내소사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더불어 변산의 4대 명찰로 불렸지만 다른 절들은 전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내소사만 남아있다.

 

보물 제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소사 고려동종(高麗銅鐘)은 1222년(고종 9년) 변산의 청림사에서 만든 종으로 청림사가 폐사되면서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은 1857년(철종 4년) 내소사로 옮겼다. 높이가 1.3m에 직경 67cm인 전형적인 고려 후기 작품으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범종각을 지나 봉래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앞에 다다른다.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낮은 기단과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했던 다포계 건물로서 공포의 짜임은 외 3출목과 내 5출목으로서 기둥위에는 물론 주간에도 공간포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반자를 댄 천장에 꽃무늬 단청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건물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운 맞춘 건물로도 유명하다.

 

내소사를 중창할 당시 대웅보전을 지은 목수는 삼년 동안을 나무를 목침덩이만 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나무 깎기를 마친 목수는 그 나무를 헤아리다가 하나가 모자라자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며 법당 짓기를 포기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사미승은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한 나무토막은 쓸 수 없다며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대웅보전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안 천장은 왼쪽에 비해 나무토막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소사의 제일가는 아름다움은 내소사 대웅보전의 정면 3칸 여덟 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일 것이다. 연꽃과 국화꽃이 가득 수 놓여 진 문짝은 말 그대로 화사한 꽃밭을 연상시키며 원래는 형형색색으로 채색되어 있었을 그 꽃살문이 나무 결로만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아련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한곳 한곳을 지극한 정성으로 파고 새긴 옛 사람들의 불심에 새삼 고개 숙여지는 이 문살의 꽃무늬는 간살 위에 떠 있으므로 법당 안에서 보면 꽃무늬 그림자가 보이지 않은 채 단정한 마름모꼴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마치 가물 현(玄)자의 의미처럼 가물가물한 그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 전나무 숲길.

● 상쾌한 전나무 숲으로 마무리

 

내소사의 보물 중의 하나가 일주문에서 내소사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이다. 글쎄 이 나무들이 불과 60~70년 전에 심어졌다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까? 어린 나무들을 심으며 그 나무들이 목재가 되고 열매를 맺을 걸 누가 떠올리기나 할까? 그러나 내소사의 일주문에 접어들면서 그 생각들은 저절로 바뀔 것이다.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진실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훤칠한 대장부처럼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에는 내장산 가을 단풍의 인파에 밀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그래도 전나무 숲길은 얼마나 상쾌한가.

 

이런 숲길을 걸을 땐 한 꺼풀 한 꺼풀 입었던 옷들을 벗을 일이다. 삼림욕이 아니라도 잣 내음 같은 솔잎향내 같은 이 냄새에 온몸을 내맡겨볼 일이다. 전나무 숲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오는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뒤편에 내소사 전경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고, 일주문 근처에는 거대한 당산나무가 있다. 나이가 950년쯤 되었을 것이라는 이 나무는 할머니 당산으로 내소사 동종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한 짝이라고 한다.

▲ 내소사.

그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 산자락에 어둠이 내리고 내소사도 변산도 어둠 속에 서서히 잠 있었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