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머님은 임실군 성수면이 친정이시다. 그래서 임실댁이라고 불렸다. 옛날이라 배우시지는 않았으나 머리가 남달리 영리하시고 예쁘셨으며, 말을 재치 있게 잘하여 별명이 변호사였다.
우리를 보면 항상 웃는 낯으로 유머를 잘하셨다. 어려운 시절에 5남 5녀의 자녀를 키우다 보니 변변히 가르치지도 못하셨다. 김제 시골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가산을 정리하고, 그리운 고향을 떠나 서울 노량진 산꼭대기로 이사 하셨다.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기거하였다. 그때가 60년대 말이다. 자녀들이 회사에 다니면서 근근이 사셨다. 그런데 의문이 있었다. 큰어머님 오빠가 국회의원도 하시고, 변호사를 하시는 성공한 오빠였기 때문이다.
큰 어머님이 힘들게 사셔서, 오빠의 도움을 받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웃으셨다. 큰 어머님은 농촌 다른 아낙네와 달리 오빠를 자랑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다. 전혀 도움을 받으려는 기색도 없었다.
큰 어머님의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오누이간에 베풀며 사시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사람의 능력은 한이 없다. 한 사람이 몇 만 명을 먹여 살리는 분도 있다. 성공하였다면 몇 안 되는 형제자매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변호사라는 직업은 누구나 성공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여의도에서 90세가 넘도록 변호사를 하시다가 10여 년 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변호사님의 생애가 궁금하였다. 임실 고향에는 어떤 도움을 주셨는지, 큰어머님 자녀에게 물어봤으나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며느리를 얻고 보니 변호사님과 앞뒷집이 아닌가. 작년에 사돈하고 용담댐으로 놀러 가기 위해 사돈댁에 들러야 했다. 변호사님이 고향에 남긴 것이 있는지 알아보는 좋은 기회가 왔다. 동네 앞 어귀에 비석을 남겨놨다고 하셨다. 비석의 내용은 88올림픽 때, 이 마을 청년이 육상 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내용이었다. 돌의 길이는 1.5m 정도의 예쁜 자연석이다. 그 비용을 변호사님이 부담했다고 한다. 서울로 이사 간 후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동생인 큰 어머님께 왜, 남 보듯 하였을까? 사람은 스스로 일어서야 하기에 일부러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변호사 수입으로 도와줄 정도는 되지 못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본인은 어떤 느낌으로 사시었을까. 그 당시 오빠되는 분은 널리 이름이 알려져, 말만 들으면 다 아는 훌륭한 국회의원이요, 변호사지 않았는가. 지금의 변호사와도 차원이 달랐다. 큰 어머님은 30여 년 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혈육! 이 얼마나 다정한 말인가! 나는 누님 한 분과 동생 넷이 있는데 서울과 부산에서 산다. 두 동생은 나보다 못 산다. 못 사는 동생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동생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며 살아가고 있을까. 형제들에게 애로 사항이 있는지 가끔 전화만 한다. 또 고향에는 어떤 도움을 주며 살아가고 있는가. 많은 반성을 하게 하는 아침이다.
△송일섭 작가는 김제 출신으로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지난 2012년 새만금 상상일기 공모전 장려상을 수상했다. 전북문인협회회원, 영호남 수필회원, 행촌수필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