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얼굴 없는 천사'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5000여만원 두고 사라져

▲ 29일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얼굴 없는 천사’가 15년째 보내온 성금을 세고 있다. 추성수기자 chss78

올해도 어김없이 전주시 노송동에 ‘얼굴 없는 천사’가 찾아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29일 오후 3시 40분.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4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주민센터 인근 세탁소 쪽 도로에 놓아두었으니,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빨리 가져가세요. 불우한 이웃을 위해 꼭 써달라”고 말한 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직감적으로 올해도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났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세탁소 앞 도로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A4용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A4용지에는 큰 글씨체로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과 함께 동전이 들어있는 돼지저금통 등이 담겨 있었다. 금액은 총 5030만4390원으로 집계됐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 4월 한 초등학생을 통해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중노2동 주민센터에 보낸 이후 올해로 15년째 해마다 성탄절을 전후로 성금을 보내오고 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 천사는 이날까지 모두 16차례에 걸쳐 총 3억9730만1750원에 달하는 성금을 보내왔다.

 

장선경 노송동 주민센터 주무관은 “ ‘올해는 왜 오지 않나’하고 애타게 기다렸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면서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지역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송동 일대 주민들은 해마다 계속되는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기리고 그의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숫자 천사(1004)를 연상케 하는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나눔과 봉사활동을 다채롭게 펼치고 있다.

 

또한 2010년 1월에는 ‘당신은 어둠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글귀를 새겨 넣은 ‘천사의 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다. 얼굴 없는 천사가 오갔을 주민센터 옆 대로는 ‘천사의 길’, 인근 주변은 ‘천사마을’로 이름이 붙여졌다.

 

주민 황군주 씨(43)는 “얼굴 없는 천사 덕분에 마을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며 “힘든 세상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어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얼굴 없는 천사를 주제로 한 연극도 화제가 되고 있다. 창작극회는 천사의 감동실화를 주 내용으로 한 ‘천사는 바이러스’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2011년 12월에는 천사의 실체를 밝혀내겠다는 기자를 주민들이 거짓 제보로 허탕 치게 하는 스토리를 담은 연극 ‘노송동 엔젤’을 무대에 올려 관심을 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