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에 무슨 더 할 말이 남아 있을까. 짧은 지면에 다 담지 못할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은 책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도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모나리자의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도 매년 한 두 개가 아니다. 모두가 아는 고전이란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생성해 낸다.
피카소가 또 그렇지 않던가. 때마다 새로운 작품 가격으로 미술시장이 뜨거웠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가 함께 살았던 7명의 연인들 이름조차도 모두 헤아릴 정도다. 호불호가 커서 거침없는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라는 에프라임 키숀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요청되는 것은 그 이름이 모두에게 가장 공통분모가 큰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미술을 배경으로 하는 한 그를 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피카소의>
인상파에서 발원한 모더니즘 이후 입체파는 모더니즘의 절정을 이룬다. 포스트모던을 경계로 모더니즘이 더 갈 곳이 없어진 곳에 미니멀아트가 놓인다. 핵심이 되는 본질을 향한 끊임없는 축소, 미니멀아트라는 ‘최소한의 미술’은 끝을 보여주었다. 실험은 미술 외에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추상으로의 길이었다. 그 중심에 입체파가 있다.
1960년대 피카소는 입체파적 공간해석에 거친 필선들을 많이 담았다. 고전적인 작품을 보고 패러디한 작품을 한참 펼치고 난 후였다. ‘모자 쓴 여인’도 입체파 양식을 담고 있다. 입체파의 공간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단순한 하나의 시점이란 원칙을 버렸기 때문이다.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사실 힘이다. 여러 시점은 화면을 풍성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했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여인 흉상엔 앞과 옆모습이 함께 담겨있다. 입과 턱 사이를 따라가면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도 찾을 수 있다. 전시회를 열정적으로 찾는 한 기자는 이 그림에서 남녀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상을 읽어내기도 했다. 색은 면으로 칠해지지 않고 선이 하나하나 살아있다. 강한 검은 선들은 단지 몇 색만 더해 화려한 화면을 만들어 낸다.
논란 많은 피카소에 대한 혹평을 다 변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브라질을 뺀 중남미 국가 모두가 스페인어를 쓴다. 모국 같은 스페인의 영웅 피카소는 그들에게 특별하다. 100년이 넘는 베네수엘라 미술관 문화는 적어도 우리가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7개관에 이르는 국립미술관에는 세계 미술관들을 경험한 평생의 전문가들로 무장된 베테랑 큐레이터를 비롯해 1000명의 직원들이 포진해 있다. 전속 변호사들이 작품 국제교류의 행정적 절차들을 돕는다. 때마다 공인과정을 거치는 전시에 이미 수차례 나온 작품이다. 국제적인 보험, 저작권 처리 과정에서 작품의 진위를 가리는 과정이 포함된 피카소재단의 허락이 필수다. 피카소의 유화 한 점을 지금 여기서 향수하는 것이 특별한 기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끝> 최형순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