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 창조
서예를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서예가들은 옛 명필을 배우면서 자신의 글씨를 완성한다. 처음에는 붓을 잡고 운용하는 요령을 배운 다음에 선생이 직접 써준 글씨를 그대로 옮겨 쓰게 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학습자가 스스로 법첩(法帖)을 보면서 글씨를 써나가는 임서(臨書)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글씨를 쓰는 것보다 주의 깊게 글씨를 살펴보면서 글씨의 형태, 필획의 간격과 필선의 변화, 무게중심을 익히게 된다. 좀 더 고등한 단계로 진입하면, 역대 명필 글씨의 시대별 비교와 분석이 가능하게 되고 수많은 서예이론과도 접하게 되면서 과거의 글씨를 다시 한 번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를 이루게 된다. 한호(1543~1605)의 석봉체(石峯體)나 김정희(1786~1856)의 추사체(秋史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유사한 사자성어로는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여고위신(與古爲新), 입고출신(入古出新)을 들 수 있고, 박고통금(博古通今)이나 학고수성(學古修性)도 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는 것은 조상들이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살고자 늘 애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기야 1950년대까지만 해도 몇몇 화가에 의해서 이러한 전통이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이중섭(1916~1956)과 김환기(1913~1974)는 청자(靑磁)의 문양[童子文]과 백자(白磁)의 형태를 각각 재해석하여 명품 현대회화로 재탄생시켰다.
하지만 복잡한 21세기의 현대사회에 머물러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실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인은 현재의 시간만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기에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전혀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조상들처럼 과거를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시대의 변화상을 읽어 내거나 그 시대에 맞는 것을 창조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 복잡할수록 되돌아보는 게 지혜
그 옛날 조상들이 이룩했던 서예와 같은 훌륭한 학습제도, 견제와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던 정치체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옥석을 가려내는 인재등용시스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균형이 잡힌 인재를 길러내던 교육체제,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고자했던 생태관(生態觀)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되돌아보아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던져주는 방향성이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즉 오늘의 문제나 미래의 예상과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되돌아보는 것도 지혜이다. 새로운 것은 완전한 무(無)에서 창출(創出)되지 않는다. 법고(法古)하고 또 법고(法古)함으로써 창신(創新)해야 할 때이다.
△유병하 관장은 서울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했고 국립춘천·공주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