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그는 탈당이라는 중대한 선택을 했다. 1996년 권노갑 민주당 고문의 손에 이끌려 정치에 입문한 뒤 네차례 탈당 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국민경선 후보였던 그는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 됐다. 이듬해엔 당 의장(대표)이 됐다. 2007년엔 열린우리당이 인기를 잃자 탈당, 대통합민주신당으로 갈아 타 대선후보가 됐다. 대선 패배 이후 도미했지만 불과 8개월여만에 귀국한다. ‘그 새를 못참아서’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2009년엔 당의 강력한 요청을 뿌리치고 민주당 탈당을 결행하면서까지 전주 덕진에 무소속 출마했다. 1년 뒤 복당했다. 그리고 이번이 네번째 탈당이다.
이유 있는 탈당 명분에도 불구하고 당이나 자신의 입지가 어려운 시기에 탈당을 결행한 공통점이 있다. 대의명분보다는 개인의 퍼스낼리티에 의한 결정이 많았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이 선거에서 떨어지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이런 상황을 못견딘 것일까. 만약 18대(서울 동작 을)나 19대(서울 강남 을) 총선에서 당선됐더라면 이번 탈당은 없었을 것이다. 거물급인 정몽준, 한미 FTA 라이벌인 김종훈과 붙어 연거푸 고배를 마신 것이 쇠락의 직격탄이 됐다.
그의 탈당을 보는 전북인들로선 심정이 착잡할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그의 가벼움 때문일 수도 있고, 정치기둥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탈당을 비난하는 이도 있고, 한파가 몰아치는 나대지에 그를 버려둔 새정치민주연합을 원망하는 이도 있다. 정 전 의원은 그제 기자회견에서 ‘백의종군’ ‘밀알’을 언급하며 “모든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몽골기병에 자신을 비유하며 질풍노도처럼 활동하던 것이 엊그제다. 연민의 정마저 느껴진다.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손학규의 진중함이 더욱 돋보인다.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