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라는 남자

▲ 문유자

몇 년 전 무릎 연골이 파열되어 수술 받고 퇴원하던 날 의사선생님은 100% 재발을 우려했었다. 다만 재발 기간이 언제이냐는 본인이 관리하기 나름이라 했었다.

 

지인들이 내 무릎 상태를 염려하고 물어주면 다리를 극진하게 모시고 산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게 상전 같이 모시던 무릎이 또 다시 도전을 해와서 이젠 수술보다는 운동요법을 해야지 생각하고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했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지 않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소문을 냈고 준비물 점검시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 운동화만큼은 욕심을 내서 준비했다.

 

모두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건지 꽃피는 봄날이라서 새벽공기가 그리웠던 것인지 걷고 뛰고 줄넘기하고 벌써 등산을 하고 약수물까지 떠오는 분들도 계셨다.

 

일주일쯤 뛰었을 때였을까? 옆에서 같은 속도로 뛰던 J라는 남자가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낯가림도 심하고 더구나 자고 일어나 부시시한 맨 얼굴에 꾀죄죄한 차림이라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아는 체 할까 말까한 상황에 낯선 남자가 아는 체를 하는 것이다.

 

“잘 뛰십니다. 건강코스 마라톤에 출전하십니까?”

 

상쾌한 음성에 깔끔한 외모까지 음흉하지 않은 인상은 결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요 그냥 봄이라서 운동 나왔어요.”

 

하면서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고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 뛰었다.

 

5주째 되는 날 J는 내 주위로 뛰어와 보조를 맞추더니 “저 내일부터는 못나옵니다”하며 시작된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뛰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J는 여전히 같은 톤으로 차근차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J는 은행에서 직책이 과장이었단다. 갓 입사했을 때 첫눈에 반해서 오랜 구애 끝에 사내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미인대회 출신으로 은행에 취직을 하게 된 미녀였단다.

 

맞벌이를 하다가 은행 구조조정 당시 아내는 명예퇴직을 했고 신혼 때 맞벌이로 종종대느라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여유로움을 느끼며 또 다른 부부애로 오히려 구조조정을 고마워(?)했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중앙뉴스와 각 신문마다 떠들썩할 정도의 은행 비리 사고가 보도 되었고, 그 사건의 배후에 J의 상사와 아내가 얽힌 사실을 알았단다. 그에 대한 충격으로 방황과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고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결국은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형님 내외가 돌봐주고 있다며 그들이 그나마 살아가는 힘이라고 했다.

 

출근해야 하는 조급한 안타까움과, 따뜻한 위로를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럴만한 사이가 못되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본인 이야기에 취해있더니 운동을 마무리하려는 내 동작을 감지했던지 서둘러 할 말을 끝낸 J는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했나요?”하며 멋쩍어 했다.

 

난 그냥 돌아설 수가 없어서 한마디 거들었다. “힘내세요. 세상은 나쁜 일 보다는 좋은 일이 더 많다잖아요. 그래서 세상은 살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악수나 한번 하지요?”하고 내민 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잡았더니 J의 손은 그간의 힘든 시간을 말해주듯이 차가웠다.

 

새벽 운동은 무릎의 건강을 위한 계기였지만, 상담공부할 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많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라며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은사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일 운동하면서 혹시 J가 있나 무의식적으로 두리번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수필가 문유자 씨는 지난 2000년 〈지구문학〉으로 등단했다. 김제문인협회 회원으로 현재 중학교 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