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도시로 내려와 처음 맞는 새해, 여전히 익숙함보다는 낯선 것들이 더 많은 나날이다. 비단 본사와 함께 거처를 옮겨온 경우가 아니더라도 회사 업무의 특성상 원거리 출장자와 지방 근무자가 많아 직원들이 먹고 자는 문제가 항상 마음이 쓰이던 터였다. 무언가 활력과 공감을 불러 모을 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더욱이 이곳은 ‘맛의 고장’ 전주가 아니던가.
음식을 주제로 한 특별한 이벤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직원들 가운데 평소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숨은 식객(食客)을 찾아 나섰다. 객지 생활의 애환과 삶의 이모저모를 ‘한 끼 음식’을 통해 살피고자 했다. 음식에 담긴 사연만큼 뜨겁고 진한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가난했던 시절,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목구멍에 넘길 것이 없어지는 게 사람 가두는 포도청보다 더 무서운 형벌로 여겨졌었다. 가난보다 더한 배고픔의 상처. 밥은 곧 눈물이고 간절함이었다.
필자에게도 그 아픈 기억의 음식이 있다. 바로 호박죽과 찐 고구마다. 요즘은 찹쌀 새알심을 넣고 끓인 호박죽을 별미에다 건강식으로 즐기는 이들이 많지만, 퉁퉁 불은 쌀 몇 알갱이만 겨우 담긴 누런 죽을 날마다 주식으로 삼아야 했던 유년의 기억 속엔 그보다 더 쓰디쓴 약이 따로 없었다.
실제로 어느 날인가엔 속에서 받지 않는 죽을 억지로 삼키려다 가족이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욱’하고 도로 내뱉은 적도 있었다. 겨우내 한퇴기 남짓한 텃밭에서 거둔 고구마는 또 어떤가. 보리 몇 줌 넣어 지은 고구마밥은 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밥풀 묻은 고구마’라 불러야 옳았다.
쌀밥은 그야말로 언감생심. 귀한 손님이 찾아올 때만 내놓는, 집안의 마지막 체면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손님은 밥그릇을 다 비우지 않고 일부러 남겨두어 주인집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면 다시 “찬이 변변치 않아도 물 말아서라도 다 드시라” 권하는 것이 가난한 주인이 갖추어야 할, 남은 예의였다. 모두가 한 끼 밥에 가슴 쓸어내리던 시절의 얘기들이다.
어려웠던 옛날을 기억하자는 게 아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하며, 젊은 세대를 향해 객쩍은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음식에 담긴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말해 보자는 것이다. 음식 속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놓는 다리가 있다.
‘한 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겸상(兼床)의 의미는 공유협생(共有協生)과도 통한다. 식구(食口)라는 한자어도 실은 ‘밥을 같이 나누어 먹는다.’란 뜻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던가.
기왕이면 직접 만들어본 음식 이야기라면 더 좋겠다. 찌개에 담을 두부와 부침 두부를 자를 때의 미묘한 차이를 아는지, 뜨거운 물에 산 낙지를 데치는 순간의 오싹한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살아가면서 내 입에 들어갈 음식 하나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각박하고 쓸쓸할까.
음식은 기억이고 관계다. 밥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그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낳는다. 음식 속에 나의 지난날, 우리의 삶이 담겨 있다. 변하는 것은 세월이고 사람일 뿐이다.
△이상권 사장은 제18대 국회의원, 새누리당 인천광역시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