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하반영 선생 별세…마지막까지 화혼 불 살라

피카소처럼 많은 작품 낳아 / 일본·프랑스 등 세계서 인정 / '백수전' 꿈 1년 남기고…

 

“백수전을 꼭 하고 싶어. 이대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어. 아흔아홉 살에 전시회를 하게 되니 이제 3년도 채 안 남았거든. 열심히 그려야지.”

 

한국 화단의 최고령 현역작가였던 군산 출신의 서양화가 하반영 선생이 2년 전 본보 기자와 만나 스스로 다짐했던 말이다. 끝내 백수전을 열지 못한 채 이승의 끈을 놓았으나 병석에 누운 7개월 전까지 노구를 이끌고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화혼은 한국 화단의 큰 역사가 됐다.

 

그의 그림은 동양화·서양화·상업미술을 넘나들며 거침이 없었고, 그림의 재료 또한 과자껍질에 까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제한이 없었다. 1만4000~1만8000점으로 추산되는 피카소 그림 이상을 그리겠다던 선생의 의지가 실제 어느 정도 성취됐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 수가 얼마인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했다.

 

1918년생의 하반영 선생은 한국에서 뿐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통했다. 세계의 화가와 조각가들의 꿈인 일본의 ‘이과전’(2006년)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수상작 ‘생성’(검은 산을 배경으로, 한 그루 고목이 일출을 받아 하얗게 빛을 발하는 그림)은 1년간 세계 각국에 순회전시됐다.

 

그의 불굴의 예술 정신은 환갑의 나이에 프랑스 유학과 함께 서양미술을 현지체험하면서 자신의 미술정체성을 확립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시절 ‘르 살롱 공모전’우수상, ‘꽁파르죵 공모전’ 금상을 수상했다. 유럽생활에서 작업한 500여점의 작품으로 1985년 ‘뉴욕 초대전’을 가졌으며, 미술평론가협회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미술가 하반영의 이름을 미국 미술계에 각인시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는 동안에 중국의 초청으로 ‘하반영 90세 북경전’초대전을 열었으며, 그 수익을 중국 사천성 지진피애와 장애인들을 위해 기부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첫 ‘예술인 긴급복지지원’수혜자가 될 만큼 말년에 어렵게 생활했지만, 고인은 생전에 아낌없이 그림을 내놓아 수많은 자선전을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50년대 후반, 오지호 선생과 함께 시화전을 열어 한하운 시인을 도운 일화로 유명하다. 지난 연말에 군산여인숙에서 자선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2013년에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100점의 작품을 선뜻 기증했다. 그의 술을 먹지 않은 화가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베풀기를 좋아하는 선배로 예술인들은 기억한다.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은 “영욕의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던 하반영 선생은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으며 끝까지 화혼을 불살랐다”며, “그 열정은 후배 예술인에게 큰 감명을 주고 본받아야 할 귀감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시아버지 하반영 선생과 함께 화시집〈빛, 마하, 生成〉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시인이자 수필가인 큰 며느리 김용옥 씨는 ‘아버지는 화공 아닌 화신(畵神)’이라며 선생의 예술혼에 외경심을 보냈다. 김 씨는 “세상의 인연으로 맺어진 인륜의 아버지지만, 그 예술혼과 한없는 사랑으로 나를 붙들어준 유일한 분이다”는 말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애달파했다.

 

주위에서 전북미술협회장상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권유했으나 유족들은 평소 검소하게 사셨던 고인의 뜻을 상하지 않도록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유족으로는 주홍·지홍·만홍·교홍·준홍·가로·세로·양로 씨 자녀와 며느리 김용옥 씨 등이 있다. 발인은 27일 오전 10시 전주 대송장례식장. 장지는 임실 선영.

 

△고 하반영 선생 약력

 

-1918년 출생, 김영창 선생 사사, 반영미술상 제정(1994~현재)

 

-한국현대미술대상전 심사위원, 전북미술대전 초재작가 및 심사위원, 한일교류전 운영위원장, 상촌회원로작가 회장

 

-조선총독부 선전 최고상 수상(1937), 국전 2회부터 7회 입선, 광복50주년 미술부분 수상

 

-정부수립 30주년기념초대전 출품(국립현대미술관), 일본·뉴욕·캐나다·북경 초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