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계 원로' 최선 씨, 80세 현역…"철학 속에 혼이 담겨야 바르고 진실된 춤"

무형문화재 호남살풀이춤 예능 보유자 / 국악 좋아했던 어머니 따라 열살때 입문 / 이길주·김광숙·문정근·장인숙 등 가르쳐 / "전북 전통무용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해야"

어머니의 한 손에는 아들의 자그마한 손이, 다른 손에는 지푸라기로 정성스레 엮은 달걀 두 줄이 쥐어져 있었다. 달걀 하나 구경하기 힘들었던 1945년, 어머니는 열 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전주의 김미화무용연구소를 찾아갔다. 이후 어머니는 완산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위해 다시 달걀 두 줄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달걀 두 줄에 얽힌 일화다.

 

국악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따라 무용에 발을 붙인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무용가들의 스승이자 버팀목이 됐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전북의 무용계에서 자신만의 무용 분야를 개척한 그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최선(80·본명 최정철) 명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김미화 선생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고, 전주에 남은 학생들은 무용 연구소에 모여 연습을 이어나갔다. 사라져 가는 조선 춤을 배우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그는 전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던 추월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조선 춤에 대한 발 디딤, 걷기, 손동작 등 기초적인 동작을 익히고 동초수건춤을 비롯한 산조춤, 법고춤 등을 배웠다. 당시 사사한 동초수건춤은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됐다.

 

“입춤인 동초수건춤은 작은 돗자리 위에서 여자는 손수건, 남자는 줄부채를 들고 추는 춤을 뜻해요. 동초는 동기(기생집에서 시집을 가지 않은 기생)와 초립의 합성어죠. 당시에는 춤음악이 없어서 추월 선생의 장구 가락이나 구음에 맞춰 춤을 췄어요. 고등학생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춤을 배우기도 하고, 경찰학교 악단과 함께 산간 지역 위문 공연도 다니곤 했죠.”

 

추월 선생이 떠난 6·25전쟁 직후 그는 전주에서 정읍농고 출신 은방초(본명 은종협)를 만나게 된다. 부인들의 춤바람을 통해 1950년대 여성들의 사회적 욕구를 풀어낸 ‘자유 부인’ 시절, 그는 은방초와 무용 연구소를 차렸다. 어찌 보면 전주 최초의 무용 학원을 설립한 셈이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조선 춤이 발달하면서 여성들이 10명씩 무리 지어 춤을 배우는 게 유행이었다.

▲ 호남살풀이 춤.

“곱고 예쁘장한 남자 두 명이 손잡고 전주 시내를 돌아다니니 매번 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죠. 당시에는 조금만 이상해도 도민증 검사를 하던 시절이라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니까요.”

 

이후 최선은 정인방 선생을 만나 학춤과 무당춤, 살풀이춤 등 다양한 춤을 배웠다. 1960년에는 전주 도립극장에서 처음으로 무용 발표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는 최선 무용 연구소를 개설해 후학을 양성하고 세계 각국으로 무용 순회공연을 다녔다. 1996년에는 전북 무형문화재 호남살풀이춤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그가 늘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철학 속에 혼이 담긴 춤을 추라’는 것.

 

“혼이 없는 춤은 고무풍선에 지나지 않아요. 속이 빈 고무풍선은 둥둥 떠다니면서 빨강, 파랑, 노랑 등 화려함만을 내비치죠. 혼이 있는 춤은 속이 꽉 차 있어서 무겁지만 깊은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어요. 무릎을 한 번 치면서 ‘얼씨구!’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춤이야말로 바른 춤이라고 할 수 있죠.”

 

전주 지역에는 조선 시대 교방청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주와 익산, 군산 일대에 일제 시대 기생의 조합인 권번이 있어 살풀이와 승무, 검무 등의 무용이 전북 지역에서 발달해 왔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최선이 스승들에게 배운 춤 가락을 기반으로 살풀이장단에 인간의 한을 정중동(靜中動)의 춤사위로 풀어내는 호남살풀이춤을 만들었다. 호남살풀이춤은 살풀이장단에 맞춰 무당이 추던 무무(巫舞)가 기생집 예인에 의해 발전한 전북의 대표적인 전통 무용이다. 기생집 무용에 뿌리를 둔 호남살풀이를 최선이 오랜 세월에 걸쳐 무대화한 춤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 동초수건춤.

그래서일까. 그는 춤의 뿌리에 관해 누누이 말했다. “1980~90년대 한국무용이 활황을 맞았을 때는 전국무용대회에 나가기 위해 전주에서 버스 한 대를 전세해 참가할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무용계 자체의 규칙과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무용 인구와 활동 영역마저 줄어 침체기에 빠진 듯해요. 그러면서 많은 젊은 무용가들이 창작 무용에 도전하고 있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전통 무용과 창작무용을 구분해 활동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즉, 전북의 전통 무용은 뿌리를 찾아 옛것의 모습 그대로 보존할 때만 빛을 발하죠.”

 

그는 오는 6월 초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맥의 터’를 주제로 한 80주년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춤의 황무지였던 전주에서 씨를 뿌려 꽃과 열매를 맺은 최선의 춤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길주(원광대 교수·호남산조춤)는 초등학교 6학년, 김광숙(예기무)은 13살, 문정근(전라삼현승무)은 고등학교 때 나에게서 무용을 배웠어요. 이외에도 장인숙(널마루무용단 대표), 허순선(광주대 교수) 등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성장해서 전국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 뿌듯해요.”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그는 자신의 예명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다. “연극인 황철 선생이 제 나이 열아홉 살 때 ‘착할 선(善)’을 쓰면 그 이름이 널리 퍼질 것이라며 지어 줬어요. 그동안 바르고 진실한 춤을 추기 위해 좋아도 슬퍼도, 웃어도 울어도 춤을 췄어요.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저는 춤만을 추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