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걱정 마라. 혹시 네가 재수가 좋아 시험장에서 내 뒤에 앉게 되면 답안지를 보여주마.”
나는 걱정하는 친구가 너무 딱해 보여 다만 위로삼아 ‘립(lip)서비스’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 말이 소위 컨닝을 모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시험 당일 수험표를 받고 보니 그 친구가 바로 내 뒤에 앉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윽고 시험 첫 시간, 나는 시험지 문제를 풀고 뒷자리 친구에게 약속대로 답안지를 보여 주었다. 비록 위로의 말이었지만 친구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시간에도 나는 답안지를 친구가 볼 수 있도록 슬그머니 밀쳐놓았다. 그런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시험감독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나에게 1차 경고를 주었다. 그런데 셋째 시간에도 친구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참으로 고민스러웠다. 친구를 외면하자니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허사가 되고, 계속 보여주자니 이번에는 선생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고민 끝에 ‘부정행위’ 그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답안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선생님이 갑자기 “학생, 답안지를 놓고 나가!”라고 소리치며 답안지에 빨간 색연필로 ×표를 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 친구는 시험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우리는 시험장을 쫓겨나 학교 앞 중국식당에 마주 앉았다.
“걱정할 것 없다. 너는 전주에 남아 2차 고등학교를 가면 될 것이고, 나는 기왕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서울에 가서 2차 고등학교를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친구를 위로해 주고 다음 날,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고모님 댁에 의탁하며 서울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를 시험장에서 쫓아낸 분은 천 건 선생님이었다. 서울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천 건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러나 선생님은 반가움보다는 내가 앙심을 품고 찾아 온 것은 아닐까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담고 정직하고, 정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셨다.
만약에 전주고 입시장에서 우리의 부정행위가 발각되지 않았다면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천 건 선생님께서 정말 큰 교훈을 주셨다는 생각에 지금도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대통령 비서실장 재임 시절, 청와대로 손님이 찾아왔다. 천 건 선생님께서 결혼한 의사인 아들과 며느리를 인사차 내게 보내신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진심어린 격려를 해 주었다.
어느덧, 58년의 세월이 지나 그 일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때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
입시위주의 교육이 인성교육을 실종시키고 극심한 경쟁이 윤리와 도덕의식을 마비시키는 요즘과 같은 세태에서 천 건 선생님의 엄격한 교육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