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주(79) 명창이 춘향가의 한 구절을 들려주며 묻는다. “(첫 번째) 나는 모른다 나는 몰라. 끝났어. (두 번째) 나는 모른다 나는 몰라. 뭐 어떤 게 좋아?” 조심스레 두 번째 소리가 좋았다고 하니 “얼라? 소리 들을 줄 아나 비네”라고 한다. 앞은 겉 목으로 소리했지만, 뒤는 힘을 꽉꽉 담아서 불렀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인 이일주 명창은 판소리를 하는 데 있어 감정 즉, 진심을 가장 중요시한다. 소리의 감정 전달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그에게 동초제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예술 가운데 판소리만큼 어려운 게 없어. 판소리는 호흡에 따라서 감정을 집어넣는 거여. 그래서 관객들을 울릴 때 울리고, 웃길 때 웃기고 다 자기 재능대로 하는 거지. 자득(自得)으로 마음대로 웃고 울 수 있는 것이 판소리야.”
193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옥희. 증조부는 서편제 명창 이날치, 부친은 소리꾼 이기중 선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서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군산으로 옮겨온 14살 때부터 부친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평소 김연수, 임방울, 신영채 등과 교류해 온 부친을 따라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국악단 해산 뒤에는 박초월 선생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김소희 선생에게 심청가와 춘향가 토막 소리를 배웠다. 이 두 명창에게 배운 판소리로 당시 전주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였지만, 동초제 다섯 바탕에 대한 갈증이 늘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전주에서 오정숙 선생을 만나 동초제 다섯 바탕을 이수하고 완창이라는 개념을 깨우치게 된다. 오정숙 선생에게 판소리를 사사한 지 4년 만인 1979년 전주대사습 장원의 영예를 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8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가 됐다.
박초월, 김소희, 오정숙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운 그는 제자들을 많이 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리를 잘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을 때 제일 기쁘다는 그는 오정숙 선생이 1977년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간 뒤 전주에서 김연수의 판소리를 가르쳤다.
그는 동초제 오바탕을 끝내고 죽는다는 각오로 절치부심해 오바탕을 완성했다.
“오정숙 선생님하고 죽어도 오바탕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갈고 했어. 오정숙 선생이 했는디 내가 안 하면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오바탕 완창 발표를 다 하고 음반까지 냈지.”
실제로 이 명창은 1995년 킹레코드에서 춘향가, 2003년 신나뮤직에서 심청가·흥보가, 2005년 수궁가, 2007년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음반으로 냈다. 이렇게 그는 김연수, 오정숙에 이어 판소리 다섯 바탕 모두를 음반화한 세 번째 명창이 됐다.
그는 판소리의 가장 큰 매력으로 소리의 더늠이 모두 다른 점과 다섯 바탕에 담긴 삶의 교훈·철학성 등을 들었다. 동초제는 논리적으로 기승전결이 완벽한 것은 물론 사설의 논리성, 소리의 이면성 등이 큰 장점이라는 것.
“춘향가는 열녀, 심청가는 효, 수궁가는 충신, 흥보가는 우의, 적벽가는 믿음 등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 예술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삼강오륜을 다 포함하고 있어. 또 동초제는 부정확한 오자(誤字)가 없어. 가사가 ‘귤’ 인디 잘못 배운 사람은 ‘겔’이라고 말하지. 판소리는 글과 문장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표현력이나 전달력이 분명해야 해.”
판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요건을 묻자 “소리하는 사람은 타고난 목구성이 좋아야 해. 목구성이 없으면 오바탕이든 토막 소리든 사람들이 듣기 싫어서 도망가 버려. 사람의 오장을 건드려야 혀. 목구성이 된 다음에 시청도 나오고, 통성도 나오고, 하청도 제대로 쓰고, 중간 목도 제대로 쓰고 다 그리여.”
보통 소리꾼은 자신의 소리에 미쳐야만 소리를 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는 자정 12시, 갑작스레 귀신처럼 목소리가 나오면 신이 나 새벽 3~4시까지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는 이제 정오의 태양보다 지는 태양이 더욱 붉게 타오른다는 일명 ‘패티김 정신’을 외치며 직접 무대에 서는 것보다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도 남는다. 크게 아쉬운 점으로는 스타 판소리꾼 부족과 귀 명창의 감소를 꼽는다. 판소리 전설을 만들어야 하지만 최근에는 감동을 주는 명창이 극히 일부에 그친다는 것. 또 귀 명창이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이제는 2시간가량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양적인 풍요 속 질적인 빈곤’을 맞은 상황이다.
그는 “판소리를 기능적인 측면에서 향유하는 데 그치지 말고, 안에 담긴 정신까지 계승해야 한다”며 “제자들이 판소리를 제대로 배워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랄 뿐”이라고 강조한다.
끝으로 ‘다시 태어나도 판소리를 공부하겠냐’라는 고리타분한 질문을 던지니 이 명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난 대통령 하라고 해도 안 혀 소리하지. 대통령은 5년이면 끝나잖어(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