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그 누구도 갈등 없이 살 순 없다. 예수도 한 인간으로서 갈등을 경험하며 사셨지 않은가. 결함투성이인 우리 인간이야 오죽할까.
그렇기에 우리는 갈등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갈등에 잘 대처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더욱 애써야 한다.
인간은 아무리 비슷한 문화와 배경 속에서 자랐고, 덧붙여 성격이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서로 다르다. 갈등을 결코 원하지 않지만 반드시 찾아오는 불청객이 바로 갈등이다. 심지어 가까울수록, 접촉이 잦을수록, 갈등은 더욱 쉽게 다가선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갈등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갈등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부인한다고 하여 결코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더 낫고, 갈등을 풀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게 더 현명하다.
그럼 누가 가장 큰 피해자인가?
갈등을 만드는 바로 그 당사자이다.갈등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때 그때 갈등 해소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삶이다.
갈등을 쉽게 풀고 싶으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라.
알량한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자존심만 내세우는것은 자기가 못난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제스처 일 뿐이다. 자존심을 지키려다 더 큰 것을 잃게 됨을 잊지 말기를 주문한다. 진짜 용기 있는 사람, 정말 멋진 사람은 먼저 ‘미안하다’고 손 내밀 줄 아는 사람이다.
먼저 손을 내밀고 사과하는 것은 절대 비굴한 것도, 결코 치사한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민다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함께 손을 내밀어 줘라.
갈등을 겪는 데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없다. 어느 정도 가해자이고, 동시에 피해자이다.
나만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아무리 피해자라고 생각할지라도, 나 역시 가해자임을 잊지 말아야 함을 거듭 지적한다.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부터 버려야 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피곤하고 힘들다.
100% 옳은 게 어디 있겠는가?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다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 입장을 조금만 이해하고 배려하면 된다. 서로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면 통상 역지사지의 마음이 결핍되어 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자기밖에 모르니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자기 만족만 채우려 하니 상대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가 에피쿠르스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의(義)로운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고.
익산시와 노조에 주문한다.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을 훌훌 털고,시민과 지역발전을 위한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제라도 되돌아보길.
노조는 엄동설한 차디찬 바닥에 자리를 깔았던 철야 단식농성을 풀고, 그런 노조를 향해 익산시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골깊은 갈등의 골도 금방 사라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