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먼 기억 속으로 떠나보자. 조선후기 물류운송수단은 해상으로 통하는 수로교통이었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조약으로 인천, 원산, 부산 등 항구가 개항되면서 서양문명까지 유입돼 항구는 본격적인 시장경제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고속철도 시대 우려도 있지만
해로유통이 활발해지면서 포구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된다. 한강수운을 중심으로 충주, 줄포, 강경 포구 등은 해상을 이용한 물류가 집하되면서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다. 한반도는 산이 많아 육상으로 통하는 도로 개설은 당시 상황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은 자연적으로 물길이 만들어지고 하천은 강이 돼 수로가 형성됐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전통적인 문물의 이동은 내륙에서 포구로 이어졌다.
그러나 철도가 등장하면서 포구는 점점 쇠락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철도는 일본 본토와 만주를 연결하는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식민지 정책의 가장 우선 순위였다. 한반도를 사방으로 연결하는 철도의 종단역은 대개가 항구나 국경도시였다. 철도역은 전통도시의 몰락을 가져오고 신도시의 등장을 가져왔다. 경부선은 원래 금산, 논산, 공주 노선으로 설계됐으나 대전으로 노선이 변경됐다. 허허벌판인 대전은 철길 덕분에 대도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수운의 중심지인 충주도 조치원역이 생기면서 청주로 상권이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남선도 광주와 전주를 연결하는 노선였지만 제외됐다. 일본은 전주의 일부 인사가 반대했기 때문에 제외됐다고 주장하지만 전주의 역사성과 고도의 전통을 무시하려는 정책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선에서 제외된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전주와 익산을 오가는 경편철도가 개통됐다. 협궤 증기철도로 전주역은 옛 전매청 구역 내 서쪽에 있었다.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를 보면 1925년에 경편철도를 타고 전주로 오면서 기록한 글이 나온다. “됫박 같은 경철에 백탄을 피운 동그란 화로 한 개일 망정 난방이란 설비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보기부터 시원한 전주평야를 동남으로 내려간다. 채신없는 값으로 어떻게 까불깝죽하는지, 마치 요망스러운 당나귀에 올라 앉은 것 같다.”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을 꼽으라면 철도다. 철도는 속도감을 오감으로 느끼게 해준 문명의 상징으로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관계망이자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길은 공간과 전통생활의 재편도 가져왔다. 남녀가 유별하고 반상이 차별되는 신분제도 아래에서 기차의 등장은 요금만 내면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열차로 운행돼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아픔도 겪었다. 필자도 어렸을 적 서울에 갈 때는 완행열차를 타고 갔다. 기차가 중간 지점인 서대전역에서 잠시 정차할 때 가락국수를 먹던 생각이 난다. 여행의 참맛은 기차여행이 단연 압권이다. 굉음을 내면서 긴 꼬리를 물고 달리는 기차를 보노라면 왠지 멀리 떠나고픈 생각이 절로 난다. 기차 안에서 여객차장이 파는 삶은 달걀을 먹으며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는 것은 기차 여행이 주는 매력이다.
전북 찾는 관광객 늘었으면
고속철도가 운행되면 상권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쏠림 현상으로 우려의 면도 있다. 그러나 관광객의 유입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바운드 투어가 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그것은 지역민과 지자체의 몫이다. 고속철도 시대가 열리지만 노선연장과 요금인상으로 시끄럽다. 잘 해결돼 전북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