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백자와 조선 청자

▲ 유병하 국립 전주박물관장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의외로 많다.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고려백자’와 ‘조선청자’가 그러한 사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알아도 고려에서 만든 백자와 조선에서 만든 청자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전통문화 단선적·도식적 이해 탈피

 

고려시대의 백자는 청자가 처음 만들어지는 10세기 무렵부터 전 시기에 걸쳐 꾸준히 생산되었다. 즉 청자와 백자는 오랫동안 생명력을 같이한 도자기였다. 그릇의 형태[器形]나 문양(文樣)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제작방법이 청자와 같았다. 다만 백자 고유의 흙[胎土]을 찾아내지 못해서 청자를 만들던 고령토(高嶺土)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굽는 과정에서 자기화(磁器化)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백자는 청자에 비해 질감(質感)이 약간 떨어지고 표면은 엷은 녹색이 감도는 유백색(乳白色)을 띠게 된다.

 

이렇게 생산된 고려백자의 초기 흔적은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여주 중암리 등의 가마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용인 서리와 여주 중암리는 백자만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 이후에도 부안 유천리와 같은 대규모의 가마 단지에서 고급 백자가 청자와 함께 생산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자상감모란문매병(白磁象嵌牡丹文梅甁)과 백자상감연애초문합(白磁象嵌蓮唐草文盒)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청자는 분청사기 및 백자와 함께 소량이나마 조선 초기부터 생산되었다. 주로 경기도 광주(廣州)의 백자 가마에서 17세기 중엽까지 생산되었다. 즉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에서 백자와 같은 흙을 사용하되 백자와는 달리 푸른빛이 도는 유약(釉藥)을 그릇에 덧씌워서 구운 것이다.

 

그런데 각종 기록에 의하면 동궁전(東宮殿)에서 사용된 그릇이 청자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는 유교적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왕실에서 왕과 왕비의 그릇인 백자와 구분하여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전용 그릇으로 청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하는 조선시대의 청자로는 청자항아리(靑磁壺)와 청자음각운문대접(靑磁陰刻雲文大 )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백자와 조선청자는 한국도자사(韓國陶磁史)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할 만큼의 명품 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려시대는 청자만이, 조선시대는 백자만이 생산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통문화를 단선적(單線的), 도식적(圖式的)으로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고려시대에 새롭게 청자를 만들면서도 백자까지도 만들어 유통(流通)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본격적인 백자 전성시대를 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약을 달리 사용한 청자도 만들어 왕실에 공급하였다. 보다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내겠다는 그들의 창조적 시도와 실패마저 기쁘게 감당하였던 인고(忍苦)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만을 기계적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 문화의 다양성(多樣性)과 조상들의 창조성(創造性)은 간과(看過)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토대로 창조적인 변용(變容)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다양성 시대, 창조적 인재 길러내야

 

바야흐로 문화융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부터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층에게라도 고려백자와 조선청자가 존재하였음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 대한 좁은 폭의 이해를 극복하고 다양성의 시대에 어울리는 창조적 인재를 길러내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