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도 하고 고향에서 새해를 맞으면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전주로 향하던 차 안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님의 전화를 받았다. 삼청동 인수위원회 사무실로 급히 오라는 연락이었다.
나는 부름을 받고 부랴부랴 상경하여 대통령 당선자와 마주 앉았다.
“한 동지! 이거 큰일이오. IMF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사·정의 협력과 화합이 필요하오. 지금 나라를 구할 길은 노·사·정이 타협하는 길밖에 없소. 그게 안 되면 IMF에서 우리한테 돈을 꾸어 줄 수 없다고 하지 않소. 그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소? 지금 국고가 바닥나 있소. 이 일은 정권에 관한 문제요. 한 동지가 이 위기를 극복해주기 바라오.”
대통령 당선자께서는 간혹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는 ‘동지’라는 호칭을 쓰시곤 했다.
대통령 당선자의 짧지만 간곡한 말씀에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인수위 사무실을 나섰지만 앞이 막막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는 노동연구원 사무실 한 칸을 빌려 협상테이블을 마련했다.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와 정계 대표들이 마침내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이는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1998년 1월15일 노·사·정 및 정당이 참여한 노사정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당시 외환 고갈과 외채의 늪에 빠진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시급한 당면과제에 대해 노·사·정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만큼 당시의 국가경제는 다급했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하고 합의를 도출해 내기 위한 서로의 입장은 달랐다.
협상의 고비마다 의견이 마찰하고 서로 다투는 소리가 협상장에 가득했다. 교착상태는 물론 때로는 회의 불참을 선언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사태가 빈번했다.
한마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필요했다. 경영자는 노동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하고 노동자는 경영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가 국난에 처한 현실을 인식하게 했다.
그리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사·정이 조금씩 양보해 고통을 분담하는 길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노사정위원회의 ‘마라톤 협상’은 끝이 없었다. 낮과 밤에 이어 새벽으로 이어지는 마라톤 협상을 거듭하던 1998년 2월 6일 새벽, 드디어 우리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탄생시켜 전 국민을 감동시키고 ‘全 국민 금모으기 운동’과 함께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에 보여 주었다.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자 한국에 외채를 빌려준 외국 대형 금융기관들은 만기를 연장해 주었고, 이로 인해 한국은 외환금융 위기의 벼랑 끝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1998년 2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단군 이래 최초라는 노·사·정 합의서를 발표하면서 나는 노·사·정 모두가 자신들의 어려운 입장을 떠나 ‘국가를 살려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합의서를 만들어낸 각계 대표들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사용자는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고, 대한민국은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닥쳐도 극복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랑스러운 국가라는 확신을 가진다.